등록 : 2019.03.23 03:00
수정 : 2019.04.21 13:19
SBS ‘열혈사제’…선과 악을 떠도는, 회색의 우리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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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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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사제>(에스비에스)는 불의가 판치는 도시에서, 가톨릭 사제가 정의를 위해 나선다는 코믹액션 히어로물이다. 시청률이 매우 높은데, <김과장>(2017·한국방송2)을 썼던 박재범 작가의 맛깔나는 대사가 한몫한다. 주·조연 모두 호연을 펼치는 가운데, 특히 김남길과 이하늬의 연기는 물이 올랐다.
드라마의 분위기는 명랑하지만 내용은 굉장히 심각하다. 적폐로 똘똘 뭉친 구담구에서 구청장, 국회의원, 검찰, 경찰, 조폭 출신 사업가가 결탁되어 있다. 이들의 비리를 알고 맞서려던 성당의 주임 신부가 변사체로 발견된다. 검경은 수사도 없이 자살로 처리해버리고, 심지어 성추행과 횡령의 누명까지 덮어씌운다. 주임신부를 아버지처럼 여기던 김해일(김남길) 신부가 진실을 밝히기 위해 나선다. 그는 과거 국정원 요원이었으나 트라우마를 입고 사제가 되었으며, 지금도 분노조절 장애를 앓고 있다. 김해일 신부는 구담구의 검경과 싸우다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황청에 탄원서를 보낸다. 교황청이 재수사를 요청하자, 김해일 신부와 구대영(김성균) 형사가 공조수사를 개시한다.
드라마에는 많은 작품이 녹아 있다. 다혈질의 괴짜 신부가 주인공이란 점에서 이탈리아 소설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도 연상되고, 악으로 물든 고담/구담에서 검은 망토 휘날리는 히어로가 법을 초월하여 정의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배트맨>도 생각난다. 싸움 잘하는 멋진 주인공과 방해를 위해 붙여놓은 삼류 형사가 공조수사를 펼치다가 친해진다는 설정은 영화 <공조>와 닮았다. 하지만 그보다 강렬한 참조사항은 현실에서 온다. 권력 카르텔, 연예인이 낀 고위층 자제의 마약파티, ‘간헐적 단식’을 하며 투쟁하는 야당 의원, 친일경찰의 후손인 ‘토착왜구’,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 있는 적폐들, 복지재단을 경유한 돈세탁, 문재인 대통령을 재현한 실루엣 등의 키워드가 말해주듯, 현실을 깨알처럼 반영한다. 하기야 검경 유착으로 묻힐 뻔한 의문사 사건을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로 밝혔던 1987의 역사를 감안하건대, ‘부패한 권력에 맞서는 사제’의 대립구도가 낯설지만은 않다.
여기에 권력을 향한 여성의 욕망을 현실보다 앞당겨 반영한 구도도 흥미롭다. 권력 카르텔의 핵심인 정동자 구청장도 여성이고, 부장검사 라인에 들기 위해 충성을 맹세하는 박경선(이하늬) 검사도 여성이다. 흔히 권력을 다룬 드라마에서 여성들은 배제되곤 한다. 권력자들에게 상납되는 물건으로 취급되거나, 누군가의 가족이나 애인으로 등장하거나, 기껏해야 한명이 구색 맞추기로 끼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매우 진전된 구도이다. 박경선 검사는 자신을 부패검사라 칭하는 김해일 신부에게 “나는 권력이 없어서 부패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김해일 신부는 “권력이 있어야 부패하는 게 아니라, 부패한 사람이 권력에 다가가는 것”이라고 받아친다. 흔히 여성들의 권력욕은 간과되어왔다. 그동안 권력을 쥔 남성들의 연대에서 배제되어 부패할 기회가 적었을 뿐이지, 여성들의 권력욕과 출세욕도 남성과 다를 바 없다. 정동자와 박경선은 권력을 욕망하는 여성의 모습을 위화감 없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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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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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구도가 명백한 드라마인 만큼, ‘적폐청산 사이다’를 기대하며 보는 시청자들이 많다. 그러나 드라마는 ‘사이다보다 고구마’인 측면이 강하다. 카타르시스보다 성찰이 담긴 것이다. 드라마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은 구대영 형사다. 그는 선에서 악으로, 악에서 다시 선으로 부유하는 인물이다. 그는 부패한 조직의 말단에서 별생각 없이 상부의 명령을 따른다. 그는 분노하는 김해일 신부를 보고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신부님, 진짜 왜 그러세요?”라는 그의 말에는 악에 체화된 채, 선을 낯설어하는 당혹감이 역력하다. 하지만 그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안다. 악의 세력에게 동료를 잃은 뒤, 오직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더 이상 비판적인 사고를 중지했을 뿐이다. 김해일 신부의 존재는 그에게 죄의식을 환기하기에, 불편하고 성가시며 심지어 억울함마저 느끼게 만든다. 그는 출세가 아닌 생존을 위해 악의 실행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박경선 검사와 다소 다른 위치에 놓인다. 지극히 평범한 존재로 부패조직의 말단에 놓인 자기 역할에 충실할 뿐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 평범함과 비겁함과 무사유가 거대조직의 악을 완성하는 세포이기 때문이다. 구대영 형사는 “지옥은 지금 네 모습 그대로, 무한히 사는 것”이라는 김해일 신부의 말을 듣고 꺼림칙해한다. 그가 ‘악의 평범성’에 완전히 주체를 내려놓은 확신범이었다면, 그 말이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말에 섬뜩함을 느끼고, 아주 조금씩 변해간다.
어떻게 평범한 사람이 자기 생존을 위해 악을 받아들이고 실행자가 되는지, 어떻게 그가 악의 상투성과 결별할 수 있는지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친일경찰’을 비웃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악에 부역하지 않기 위해서는 구대영을 통한 성찰이 반드시 필요하다. 평범한 시청자들이 이입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인물은 ‘악의 화신’도 ‘열혈사제’도 아닌,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 회색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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