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8.16 17:36
수정 : 2019.08.16 19:14
[황진미의 TV톡톡]
<호텔 델루나>(티브이엔)가 시청률과 화제성을 다 잡았다. 여름에 어울리는 귀신 이야기이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인기가 높은 이유가 몇가지 있다. 일단 시각적 쾌감이 상당하다. 고급한 인테리어와 ‘아이유 화보집’을 방불케 하는 화려한 패션, 거기에 환상적인 그래픽이 일품이다. 둘째는 판타지적 세계관과 예측 불허의 전개, 그리고 맛깔스러운 대사를 담은 극본이 탁월하다. 셋째는 배우의 매력이다. 까칠하고 변덕스러우면서도 묘한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아이유의 표정 연기가 몰입을 더하게 하고, 여진구의 반듯한 외모와 예의바른 태도가 만족감을 안긴다.
처음에는 독창성이 적어 보였다. 일본 만화 <우세모노 여관>의 설정이 연상되고, 드라마 <도깨비>의 잔상이 짙었기 때문이다. 세련된 인테리어와 감각적인 배경음악이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천년 동안 벌을 받느라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는 주인공이나 특별한 운명을 지닌 인간과의 사랑도 공통적이다. 하지만 회차가 진행될수록 호텔 손님들의 사연이 다뤄지면서, <도깨비>보다는 영화 <신과 함께>와 접점이 느껴진다. 생각해보면 <도깨비>와 <신과 함께>가 가지고 있던 남성 중심적 한계를 <호텔 델루나>가 훌쩍 넘는다.
첫째는 젠더 비대칭이 해소되어 있다. <도깨비>에서 구백살 먹은 김신은 소녀 지은탁과 이성애 관계에 놓인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이 나이, 권력, 부, 재능, 지식 등 모든 측면에서 여성보다 우위에 있을 때 바람직한 커플로 여겨진다. 여성은 미모와 젊음만 지닌 채 비대칭적 관계에 놓인다. <도깨비>의 젠더구도는 이런 이성애 규범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호텔 델루나>에서는 천년을 산 신비한 여성 장만월이 미청년 구찬성과 이성애 관계에 놓인다. 남녀의 자리만 바뀐 게 아니다. 비대칭의 정도가 완화되고 변태적 설정이 줄어들었다. 일단 구찬성은 미성년자가 아니다. 장만월의 후원으로 엘리트 교육을 받고 사회초년생이 되어 대면한다. 또한 그는 꿈을 통해 장만월의 과거사를 보기에, 정보 비대칭이 줄어든다. 지은탁은 오갈 데가 없는 고등학생에 ‘도깨비 신부’라는 예언만 있을 뿐, 자신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에 비해 구찬성은 다소 대등한 위치에서 능동성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장만월이 놓아주었음에도, 그는 제 발로 장만월을 다시 찾는다. 김신의 몸을 관통한 검을 지은탁이 뽑아준다는 직접적인 신체 훼손의 이미지 대신, 장만월을 대신한 월령수에 구찬성이 꽃을 피우게 한다는 은근하고 자연 친화적인 이미지도 상징성을 높인다.
장만월의 전사와 캐릭터도 매우 흥미롭다. 그는 마적이었으나 관군의 사랑을 믿었다가 배신당해 동료들을 몰살시켰다. 원수를 갚기 위해 공주를 죽일 때, 그의 칼끝에는 망설임이 없다. 배신한 남자를 향한 복수심도 천년 동안 변함없다. 선함과 용서를 바탕으로 한 전통적인 여주인공 캐릭터와 사뭇 다르다. 그는 현재에도 친절, 검소, 겸양과는 거리가 멀다. 아무에게나 반말이고, 돈과 사치를 좋아한다. 맛집과 쇼핑을 즐기며, 제멋대로 명령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멸시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호텔 사장이라는 지위와 문제 해결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능력과 욕망을 인정치 않고, ‘된장녀’니 ‘김치녀’니 여성 혐오적 비하를 퍼부으며, ‘캔디형’ 여주인공만 양산하던 불과 몇년 전만 해도 감히 생각할 수 없던 캐릭터다.
<호텔 델루나> 속 망자들의 사연도 <신과 함께>와는 다른 젠더적 의미를 지닌다. <신과 함께>는 남성의 한에 주목했다. 병든 어머니를 죽이려 했다는 죄의식을 안은 채 집을 뛰쳐나와 밤낮으로 돈을 벌어 집에 보내면서도 한번도 가족을 찾지 않은 큰아들의 가족애는 스스로를 가족 부양자로 여기며 일방적으로 일상의 관계를 절연하는 남성적 자의식의 병폐를 고스란히 지닌다. 군대에서 의문사한 동생도 전형적인 남성의 원한을 보여준다. 여기서 어머니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다. 반면 <호텔 델루나>에는 여성적 문제의식이 가득하다. 불법 촬영한 동영상이 유출되어 죽은 여성의 사연은 작금의 호러가 마땅히 다뤄야 할 고발을 수행한다. 평범한 남자들이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에서 불법 촬영물을 즐기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가해자는 웹하드 업체 사장으로 떼돈을 버는 모습이 너무 현실적이라 몸서리쳐진다. 드라마는 가해자에게 신적 응징이 가해지는 모습을 경이롭게 보여줌으로써, 환상의 사회적 책무를 다한다.
처녀 귀신에게 영혼결혼식을 시켜주려는 부모인가 했더니, 아들을 살리기 위해 연인이었던 여자의 영혼을 떼어놓으려는 남자 쪽 부모였다는 반전도 기막히다. 하기야 아들을 살리기 위해 남의 영혼에 무슨 짓이든 할 부모는 있어도, 죽은 딸을 위해 큰돈을 쓸 부모는 드물지 않은가. 중매결혼한 뒤 마음 둘 데 없던 여성이 강한 정념으로 허구적 자아를 만들어온 것이나, 첫사랑이 죽자 아무하고나 결혼해버린 여자가 죽은 후 남편을 팽개친 채 첫사랑과 만나 행복해하는 에피소드도 여성의 욕망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보아 음미할 만하다.
<신과 함께>에서 염라대왕은 남성의 모습을 한 심판자고, 인간은 죽어서도 수많은 재판을 거쳐야 했다. 반면 <호텔 델루나>에서 신은 여러 모습을 한 마고할머니이고, 망자는 호텔에서 편히 쉬며 생전에 못한 것을 다 해보고 저승에 간다. 자, 어떤 사후 세계를 믿고 싶은가.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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