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8.30 19:26
수정 : 2019.08.31 12:54
[황진미의 티브이 톡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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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티비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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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가 체질>(제이티비시)은 영화 <극한직업>으로 천만 관객을 모은 이병헌 감독의 드라마다. 전작인 웹 드라마 <긍정이 체질>에서 시도했던 설정과 분위기가 장편 드라마에서도 잘 살아 있다. 예컨대 작품 창작 과정이 메타적으로 담기고, 말맛이 느껴지는 대사의 향연이 펼쳐진다. 이는 이병헌 감독의 전작들을 관통하는 특징이기도 하다. 가령 신인감독 입봉기를 자전적인 ‘병맛’ 코미디로 담은 영화 <힘내세요, 병헌씨>나, 엄청난 대사량과 허를 찌르는 유머로 의외의 흥행을 거둔 <스물>과 <극한직업>에서도 발휘되던 장점들이다.
‘본격 수다 블록버스터’를 표방하는 <멜로가 체질>도 과연 재밌다. 2030 세대를 겨냥한 참신한 대사가 돋보이고, 연기도 뛰어나다. 특히 천우희와 안재홍의 노련한 연기는 어이없는 상황들도 어색하지 않게 살리는 묘미가 있다. 연애에 대한 묘사도 생생하다. 흔히 멜로에서 연애는 달달하게 그려지지만, 무릇 연애의 달콤함은 짧고 괴로움은 긴 법이다. 진주(천우희)와 환동은 7년을 사귀었지만 그중 5년은 이별과 재회의 반복이었다. 한편 재훈(공명)과 하윤은 격렬한 싸움 속에서도 동거를 이어간다. 전쟁 같은 연애를 끝내지 못하는 애증의 지리멸렬함과 이별 후 상실감으로 자아가 무너지는 고통을 드라마는 오롯이 전한다. 이별 후 진주는 갑자기 명품 가방에 꽂혀, 이를 갖고 싶다는 욕망을 지렛대 삼아 일에 대한 성취욕을 불태운다. 소비자본주의 시대에 자아를 추동하는 힘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짠한 에피소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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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티비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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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진주가 쓴 대본 <서른 되면 괜찮아져요>가 드라마로 제작되는 과정을 메타적으로 담는다. “여자들만 나오고, 사건이 아닌 캐릭터의 힘으로 밀고 나가는 드라마”라는 설명은 그대로 <멜로가 체질>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잘나가는 남성 감독과 신인 여성 작가의 협업이라는 점과, 제작 현장의 온갖 갈등의 묘사도 메타적 기시감을 더한다. 드라마는 젊은 여성들의 일과 사랑을 담는데다, 직장 내 성희롱 등 성차별에 대해 발언하며, 속사포적인 대사로 여자들의 속내를 들려준다는 점에서 여성주의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인물들의 관계를 뜯어보면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
드라마에서 세 여자와 남동생인 게이, 그리고 어린 아들이 한집에 산다. 누구나 소망할 법한 유사가족의 모양새지만, 이들이 중형 아파트에서 살 수 있는 것은 은정(전여빈)이 ‘벼락부자’가 된 덕이다. 영화사에서 잡무와 성희롱에 시달리던 은정은 회사를 때려치우고 독립 다큐멘터리를 찍어 대박이 난다. 작품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이 홍대(한준우)인데, 인터뷰 상대였던 그는 은정에게 성공과 더불어 필생의 사랑을 안겨주고 죽는다. 은정은 자살을 시도할 만큼 그의 죽음을 애도하다가 이제는 아예 홍대의 환영과 함께 산다. 그뿐인가. 진주의 원고는 공모전에서 떨어졌지만 잘나가는 손 감독(안재홍)의 눈에 들어 제작 기회를 얻는다. 진주는 옛 연인 환동이 조감독이란 사실에 기겁하지만, 손 감독이 매달려 일을 진행한다. 그런데 진주와 손 감독은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만취된 상태로 같이 잔다. 순진한 대학생이던 한주(한지은)는 스토커처럼 쫓아다니던 승효와 사귀었다가 싱글맘이 된다. 일과 육아로 힘겨워하던 한주는 부하직원 재훈에게 연정을 품는다. 한편 배우 소민(이주빈)은 매니저 민준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한다. 연극적인 성격의 소민을 보살피는 민준은 마치 어리광쟁이 동생을 돌보는 오빠 같다.
요컨대 드라마 속 여성들은 모두 ‘일로 만난 남자’와 연애관계를 맺으며, 사회적·심리적으로 남자가 관계 우위에 놓인다.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의 세 여자들이 일과 연애를 분리했으며, 관계 우위를 점했던 것과 비교하면 낡은 젠더구도다. 진주가 환동과의 파탄 난 연애를 떠올리며 동생 커플에게 읊어대는 말들도 여전히 여자는 남자의 아량 넓은 사랑을 갈구한다는 인상을 풍긴다. 무엇보다 오랜 친구인 세 여자가 함께 살지만, 각자 연애에 빠져 있을 뿐 이들끼리의 상호작용이 적은 것은 아쉽다. 오히려 드라마에서 가장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은 동거 중인 하윤의 외도를 접한 재훈의 괴로움을 비출 때다. 이는 영화 <스물>에서도 중요하게 다룬 감정으로, 드라마가 여자의 내면보다 남자의 내면을 능숙하게 그린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처럼 드라마는 “왕자님은 나오지 않지”만, 여전히 여성의 일과 삶에 남자의 사랑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그리는 등 ‘남자 못 잃는’ 한계를 명확히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적인 측면이 있다. 은정은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소민을 다큐멘터리로 찍으며 차츰 이해하게 된다. 가장 친해지기 힘든 스타일로 여겨지던 두 여성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지점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한주의 회사 대표인 이소진이 보여주는 리더십도 흥미롭다. 그는 하윤이 재훈의 회사로 찾아와 벌인 난동을 “없었던 일”로 덮어주고, 한주의 성실함을 인정하여 승진시킨다. 싱글맘인 한주가 직장생활을 오래 할 수 있었던 요인 중에 ‘차가워 보이지만 편견 없는’ 이소진의 리더십도 한몫했을 것이다. 여성들끼리 차이를 넘어 서로 이해하고 끌어주는 ‘여성 연대’를 그린 장면들이 앞으로도 많이 그려지길 기대한다. 이를 통해 <멜로가 체질>이 ‘대사는 진보적이나 구도는 진부한’ 드라마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여성드라마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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