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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04 18:35 수정 : 2019.10.04 19:39

황진미의 TV 톡톡

<시크릿 부티크>(에스비에스)는 일명 ‘레이디스 누아르’를 표방한다. 국제도시 개발에 얽힌 정경유착과 재벌가의 암투를 다룬 누아르이지만, 권력과 욕망의 주체가 모두 여성이다.

데오그룹 회장 김여옥(장미희), 보육원 출신으로 18살에 김여옥 집에 하녀로 들어와 마침내 며느리가 된 제니장(김선아), 김여옥의 딸로 제니장과 경쟁하는 예남(박희본), 그리고 제니장의 눈에 든 당찬 ‘젊은 피’ 현지(고민시)가 모두 여성이다. 여느 누아르물이라면, 모두 남성이 맡았을 역이다. 가령 냉철한 재벌 회장의 신임을 얻기 위해 주인공이 재벌 아들과 경쟁을 벌이다 사위가 되고, 또 주인공 눈에 든 청년과 형님-동생 관계를 맺는 서사는 매우 익숙하지 않은가.

하지만 <시크릿 부티크>에서는 그 모든 욕망을 여성이 실현하며, 남성은 조력자로 등장한다. 보육원에서 자란 동생으로 제니장을 돕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변호사 선우, 20년간 예남을 사랑하며 예남을 돕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형사 태석, 김여옥이 시키는 궂은일은 물론이고 안마까지 해주는 황집사 등. 제니장이나 예남의 결혼에서 남자는 매개 항에 불과하다. 김여옥의 장남 정혁은 동성애자임에도 제니장의 야망을 위해 제니장과 결혼한다. 예남은 제니장과의 대결구도에서 남자를 빼앗고 싶어서 차 검사와 결혼한다. 남성들이 오직 순정을 바치며 헌신하는 존재로 그려지거나, 여성끼리의 권력다툼의 매개 항으로 놓이는 것은 일반적인 멜로의 젠더구도를 뒤집은 것이다. 그 결과 이성애 관계 안에서는 별다른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 반면, 제니장과 김여옥 사이에 벌어지는 동족 혐오의 고부 갈등, 제니장과 예남 사이의 애증과 경쟁, 제니장과 현지 사이에 흐르는 선망과 호감 등에 훨씬 많은 정서가 깃든다. 이런 여성중심의 서사는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서 한층 더 나아간 것이다.

김선아, 장미희의 호연으로 빚은 독보적인 스타일의 캐릭터들이 빛나고, 휘몰아치는 전개에 화려한 볼거리가 가득하지만, 단점이 있다. ‘과잉’의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첫회부터 미성년자 성상납과 마약 및 살인이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방아쇠를 당기거나, 아동을 상자에 넣어 쓰레기장에 유기하고, 사람들을 감금한 채 불을 지르는 등 필요 이상의 잔혹함이 그려진다. 서사에서도 고아 소녀의 입지전적인 출세기로만 그려도 충분했으련만 굳이 출생의 비밀과 구원까지 엮는 것은 ‘투머치’가 아닐 수 없다. 인물의 능력치가 너무 뛰어난 것도 몰입을 저해한다. 가령 엄마의 실종을 접한 현지는 복잡한 상황을 순식간에 이해한다. 그에게 주어진 정보는 먼 거리에서 목격한 광경이 전부이지만, 그는 자신이 본 것을 확신하며 검찰청으로 달려가고, 도망치다 처음 만난 사람의 차를 타고 그와 동행한다. 드라마는 현지가 바둑기사로 직관과 통찰에 능하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전지적 관점을 취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행보다. 재난 상황에서 반지 하나를 훔쳐 재벌가에 입성할 수 있었던 김여옥의 탁월한 거짓말 능력이나 제니장의 ‘비선실세’로서의 능력도 놀랍지만, 일견 평범해 보이는 선우도 만만치 않다. 그는 불우한 환경에서 변호사가 될 만큼 똑똑한데 깡패들을 때려눕힐 정도의 완력을 지닌다. 이들 모두 인간 종족이 아닌 초사이어인들인가 싶을 만큼 개연성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드라마는 중요한 메시지를 품는다. 흔히 여성들의 암투를 그린 막장드라마들이 많았지만, 그곳에서 악녀와 여주인공은 권력 자체가 아니라 권력을 지닌 남성과의 관계를 두고 다툼을 벌였다. 그러나 김여옥이나 제니장은 권력 자체를 탐한다. 또한 제니장이 강남의 고급 목욕탕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김여옥에게 발탁되어 고가의 옷과 장신구를 취급하는 제이부티크 사장이 되고, 그곳에서 은밀한 해결사이자 로비스트 노릇을 한다는 설정이 흥미롭다. 이것은 과거 ‘옷 로비 사건’이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밝혀진 비밀 의상실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겠지만, 여성들의 사치나 충족시켜주는 곳으로 인식되는 장소에서 국정을 뒤흔드는 고급정보가 오가고, 최상층의 인맥이 형성된다는 설정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제니장은 욕망하는 여성이지만, 막장드라마의 악녀들과 결이 다르다. 그는 주위 사람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을 지녔다. 이는 상대와 신뢰를 주고받으며 실력을 입증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제 욕심만 차리는 예남과 대조되어 더욱 분명해 보인다. 그 결과 예남을 제외한 데오가 사람들 모두 그를 믿고 따른다. 제니장은 과거 예남 회사의 직원이었다가 노사분규로 해고되고 손배소와 지명수배에 시달리는 노조원들을 돕고, 고택을 보존하며 도시를 개발하는 해법을 마련한다. 자신의 사적 욕망을 실현하면서도 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대승적인 행보를 보이는 것이다. 또한 경찰이었던 현지의 어머니가 오랫동안 성매매 여성들을 도와왔으며, 현지 역시 미진 모자를 가족으로 여기는 것이나, 김여옥의 하녀인 미세스왕과 제니장 사이의 견고한 신의는 찡한 연대감을 느끼게 한다.

악녀와 순박한 여주인공의 이분법으로 그려지던 막장드라마의 홍수 속에서 ‘욕망하는 여성의 대의’를 느끼게 하는 드라마라니, 여성주의적 진전이 아닐 수 없다.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는 말도 의미 있지만, 이제 ‘착함’과 ‘나쁨’이 다시 정의되어야 하지 않을까.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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