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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27 18:57 수정 : 2019.12.28 13:14

[황진미의 티브이 톡톡]

“사람이 먼저다.” 참 따뜻한 말처럼 들린다. 요즘처럼 사람이 홀대받는 시대에 가장 중요한 가치를 놓치지 말자는 도덕적 당위처럼 들린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사람이 먼저”라며 인정과 인맥으로 굴러가는 조직이 얼마나 부패하는지, 늘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 모여 얼마나 조직을 좀먹는 행동을 하는지 겪어본 사람은 안다. ‘사람들이 나쁜 탓’이 아니다. 사람이 먼저이고 시스템은 뒷전인 구조가 밟게 되는 필연적인 수순이다.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스토브리그>는 만년 꼴찌 팀 ‘드림즈’에 부임한 단장이 조직을 혁신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스포츠물인 것 같지만, 야구는 소재일 뿐이고 경영학과 리더십의 진기명기를 보여주는 오피스물이다. 이는 할리우드 영화로 제작됐던 마이클 루이스의 책 <머니볼>이 경영학 서적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머니볼>은 2000년대 초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빌리 빈 단장의 성공 실화를 바탕으로, 혁신적인 데이터 분석을 통해 높은 성과를 이루는 경영기법을 설파했다. 이후 ‘머니볼’은 저비용 고효율의 경영철학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시즌 100패의 책임을 지고 ‘드림즈’ 단장이 자진 사퇴하자, 그 자리에 ‘야구를 잘 모르는’ 백승수(남궁민)가 부임한다. 그는 씨름, 아이스하키, 핸드볼 등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나 팀이 해체되는 비운을 겪었다. 오자마자 그는 ‘안 되는 조직’의 문제점을 간파한다. 파벌로 나뉜 코치단, 실권 없는 감독, 매너리즘에 빠진 프런트 직원들, 부족한 구단의 지원, 사기 저하로 인한 불화 등등.

백 단장은 팀의 간판스타 임동규 선수를 방출하겠다는 일성으로 업무를 개시한다. 말도 안 된다며 아우성치는 프런트 직원들 앞에서 백 단장은 방출 이유를 설명한다. 프레젠테이션의 모범이라 할 만큼 매끈한 이 장면은 드라마의 본질과 백 단장의 매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임동규 선수가 개인 성적만 우수할 뿐 팀 성적에는 오히려 해를 끼친다는 백 단장의 통찰은 ‘세이버메트릭스(통계학적 야구분석론)란 무엇인지’ 뚜렷이 각인시킨다. 또한 타율, 홈런 수, 인기 등 판에 박힌 키워드로 평가하는 관습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무엇이 정말 필요한지 구체적으로 탐문하는 사고의 기법을 일깨운다.

에스비에스 제공

프런트 직원을 설득하는 것만으로 임동규를 방출할 순 없었다. 지역에서 ‘야구대통령’을 자임했던 임동규는 백 단장의 차를 박살 내고, 인맥을 동원해 백 단장을 겁박한다. 임동규는 구단 안팎에서 오랫동안 ‘형님 아우’ 하는 끈끈함으로 밥 사주고 술 사주고 돈 찔러줘 가며 영향력을 키워온 인물이다. 전근대적이고 마초적인 리더십의 전형인 셈이다.

그 반대편에 백 단장이 있다. 그는 합리성과 냉철함을 바탕으로 상대를 설득한다. 그의 리더십은 인맥이 아닌 실무능력에서 나온다. 매사에 힘을 뺀 듯 심드렁한 표정과 말투를 구사하다가, 이따금 냉철한 눈빛을 번뜩이며 뼈 있는 말로 상대를 압박한다. 배우 남궁민의 호연으로 더욱 빛을 발하는 백 단장의 캐릭터는 그동안 한국 드라마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인물이다. 한국 드라마에는 뜨거운 인정과 의리를 풍기며 ‘사람 냄새 난다’는 말을 칭찬처럼 듣는 남자들이 원체 흔하지 않았던가. 백 단장은 그러한 ‘인간미’가 오히려 ‘적폐’와 종이 한장 차이임을 끊임없이 환기한다. “박힌 돌에 이끼가 많다” “믿음으로 일하는 것 아닙니다”와 같은 그의 말은 개혁을 갈망하는 이들의 뇌리를 강하게 자극한다.

외부 인사를 통해 파벌과 인맥과 관성에 찌든 조직을 혁신한다는 서사는 히딩크의 성공 이후 21세기 한국 사회를 사로잡는 열망이 됐다. 그 열망의 여파로 <베토벤 바이러스> <파스타> 등 외국에서 온 실력파 리더가 오합지졸의 팀을 몰라보게 성장시킨다는 서사가 사랑받았다. <베토벤 바이러스>나 <파스타>의 주인공들은 “똥덩어리”니 “내 주방에 여자는 없다”는 등의 폭언과 비민주적인 언사를 일삼았지만, 실력에 대한 열망이 태도의 문제를 덮었다. 그러나 괴팍한 인물의 카리스마에 기대어, 팀원들이 실력을 연마하는 것은 진정한 개혁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계발의 논리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려는 피학적 욕망에 가깝다. 백 단장은 팀원들을 윽박지르지 않는다. 사람을 닦달하기보다 구조를 바꾸고, 시스템을 바로 세우길 원한다.

반면 여성 캐릭터의 설정은 다소 불만스럽다. 이세영(박은빈)은 야구를 사랑하는 운영팀장으로, 감정적이며 인정에 이끌린다. 조직사회에서 여성의 입지가 녹록지 않음을 고려하면 천진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백 단장을 보며 조금씩 성장한다. 그는 백 단장이 이해시켜야 할 야구팬 혹은 시청자의 눈높이를 대변하는 동시에, 백 단장에게 중요한 가치를 잊지 않게끔 환기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다.

드라마는 구단주의 동상이몽을 드러내며 갈등을 예고한다. 구단주의 욕망은 연 70억의 적자를 내는 구단을 팬들의 반발 없이 해체하는 것이다. 백 단장의 빛나는 개혁도 신자유주의적인 욕망 앞에서는 낭만적인 눈가리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 단장을 통해 보여주는 드라마의 미덕은 충분하다. ‘선한 사람’이 될 것인지 ‘악한 직업인’이 될 것인지 고민하는 비장한 선악 이분법이 아니라, 합리적인 직업인이 됨으로써 좋은 시스템을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음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이 되기보다 좋은 시스템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민주시민의 윤리라 믿는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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