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2.12 18:39
수정 : 2015.05.18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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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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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붕괴 이후 최악의 동서 대결 위기인 우크라이나 내전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비교해봐야 한다. 아프간 전쟁은 소련 붕괴의 단초가 된 사건이다. 우크라이나 내전도 러시아의 앞날에 중대한 기로가 될 것이 분명하다.
두 전쟁은 소련과 러시아가 인접국의 분쟁에 군사개입을 했다는 점에서 동일하나 주민들의 지지 여부는 다르다. 아프간 전쟁에서 소련은 친소 아프간 정부를 지키려고 대다수 아프간 민중들과 싸웠다. 반면, 우크라이나 내전에서 러시아는 친러 반군들을 돕고 있다. 우크라이나 내의 러시아계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 현지 주민들의 지지 여부는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러시아 국내에서도 우크라이나 내전에 대한 여론은 나쁘지 않다. 러시아가 자국 병력을 위장해 파견하기도 하지만, 자발적 자원병도 1000명이나 된다.
전쟁들에 임하는 소련과 러시아의 입장도 다르다. 아프간 전쟁은 소련의 공세였고, 우크라이나 내전은 러시아의 방어이다. 아프간 전쟁은 1970년대 이후 소련이 제3세계로 진출해가는 과정에서 정점을 이룬다. 앙골라, 에티오피아, 남예멘, 로디지아 등에 군사개입을 했고, 리비아와 베트남 등지로 군사 진출을 꾀했다. 1970년대 석유값의 폭등에 기댄 소련은 자신들의 군사력을 전세계에 산개했다. 이런 상황은 1980년대 들어 석유값이 폭락하자 소련에는 국력의 과잉전개로 뒤바뀐다. 그리고 붕괴가 시작됐다.
반면, 우크라이나 내전은 소련과 냉전의 붕괴 이후 동쪽으로 밀려오는 서방의 진출에 대한 러시아의 필사적 방어이다. 러시아에는 서방의 군사동맹인 나토를 동쪽으로 확장하지 않겠다는 미국 등 서방의 약속 파기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다. 베를린장벽 붕괴 뒤 미국과 당시 서독은 독일 통일에 대한 소련의 동의가 필요했다. 1990년 1월31일 한스디트리히 겐셔 당시 서독 외무장관은 통일 뒤 “나토 영역이 동쪽으로 확장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는 2월10일 모스크바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의 회담에서 “당연히 나토는 동독의 현재 영토로 그 영역을 확장할 수 없다”고 보장했다. 통일된 독일에서도 동독 지역에는 미군 등 나토 병력이 주둔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소련은 서방이 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독일 통일에 동의해줬다. 이 약속은 휴짓조각이 됐다. 나토는 동유럽 국가는 물론이고, 소련에 속했던 발트 3국까지도 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러시아의 발원지인 우크라이나까지도 유럽연합 가입을 추진한다. 독일 통일 당시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젊은 요원으로 동독에 있었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자명하다.
우크라이나의 위상에 대한 미국과 러시아의 합의가 없는 한 내전이 재발할 것임은 지난 10개월의 내전 상황이 말해준다. 이는 결국 ‘외교가 실패하면 살상용 방어무기 공급을 고려한다’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공언을 현실화할 것이다. 이는 우크라이나 땅에서 미국과 러시아의 간접적인 군사대결이다. 미국의 저명한 국제정치학자인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는 최근 ‘우크라이나를 무장시키지 말라’(<뉴욕 타임스>)는 기고에서 우크라이나를 나토 영역에서 제외한다는 보장이 없는 한 러시아는 내전개입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며, 핵무기 사용도 배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아프간이 될 것인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아프간이나 베트남이 될 여지는 없는 것인가? 1970년대 소련이 국력을 과잉전개한 것처럼, 미국도 지금 테러와의 전쟁 이후 과잉전개된 국력을 수습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역사는 얄궂게 돌고 도는 법이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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