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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4.16 18:41 수정 : 2015.05.18 08:55

에둘러 얘기하지 말자.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한국의 대통령을 외교적으로 능욕했다.

세월호 사건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동정에 대한 선정적 보도로 기소됐던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이 일본으로 귀국해 아베와 45분이나 면담하는 이례적인 의전을 받았다. 장탄식이 절로 나왔다. 보도의 사실 여부를 떠나, 한국의 대통령에 대해 민망한 얘기를 떠든 기자를 일본 총리가 불러 치하한 것은 외교적으로 있을 수 없는 도발이다. 아베는 박근혜를 조롱했다. 더 큰 문제는 일본의 이런 능욕에 대해 한국은 벙어리가 됐다는 거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할 때 한국은 대일관계에서 유리했다. 아베 정부는 과거사 문제에 대한 부담과 대중국 견제 때문에 한국에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처지였다. 아베는 줄곧 박 대통령에게 정상회담을 구걸해왔다. 박근혜 정부가 이명박 정부의 친미 일변도 외교정책에 균형을 잡으려는 대외정책을 펼친 것은 평가해야 한다. 박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 등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견지한 것도 원칙적으로 옳은 대응이었다. 한국의 외교 입지를 넓히기도 했다. 그런데 올봄 들어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어 한국은 외교적 재앙에 직면하고 있다. 가토 사건에서 보여준 한국 정부의 뒤엉킨 스텝들이 잘 말해준다.

유흥수 주일 대사는 가토의 출국정지 해제에 대해 “한·일 양국 관계가 좋아지는 하나의 신호를 보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며 “한쪽 국가에서 좋은 것을 하면 상대국이 이를 받아들여 다른 무엇인가를 하고 서로 좋은 것이 교환된다면 정상회담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가토 사건은 법과 원칙에 따른 것으로 한-일 관계와 무관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출국정지 해제에는 정치·외교적 해석을 달았다.

당연히 일본 쪽은 가토의 출국정지 해제를 한국의 잘못 시인과 자신들의 외교적 승리로 평가한다. 아베 정권에 비판적인 <아사히신문>도 “얼어붙은 한-일 관계를 더 악화시키지 않기 위한 대응이라는 시각이 많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가토 전 지국장 재판의 향방에 따라 한-일 관계에 더 강한 그림자가 드리울 수 있다”며 한국을 압박할 카드를 일본이 쥐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왜 이렇게 됐을까. 내정과 외교가 뒤섞여 곤죽이 됐기 때문이다. 위정자들은 흔히 내정의 우환을 타개하려고 국민 시선을 밖으로 돌린다. 한국의 위정자들도 일본을 때려서 인기를 올리려고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는 발언,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돌발적인 독도 방문은 최악의 사례다. 세월호 사건으로 트라우마를 겪은 박 대통령은, 그냥 내버려두면 일본에 부담이 될 가토의 보도를 형사처벌로 몰고갔다.

대일본 외교의 책략가인 신숙주는 <해동제국기>(1471년)에서 일본에 대해 “‘이적(夷狄·오랑캐)을 대하는 방법은 외정이 아닌 내치에 있으며, 변어(邊禦·변방 방어)가 아닌 조정에 있으며, 전쟁이 아닌 기강 진작에 있다’고 하였는데, 그 말을 이제 징험(징조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역사와 민족감정이 뒤섞인 양국 관계에서는 통치집단과 국내 여론의 조화가 관건이라고 내다본 탁견이다. 그는 임종 전에 성종에게 “일본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되, 저들과의 화호(和好)만은 끊지 마십시오”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 유언은 요즘 화제인 유성룡의 <징비록> 앞 대목에 나온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콜롬비아 대통령의 일정을 이유로 들어 세월호 참사 1주기 날에 순방을 고집한 박 대통령과 참모들은 떠나는 당일 아침까지 우왕좌왕했다. 바꿀 수 없다던 정상의 외교일정을 당일까지 고무줄처럼 당겼다 놓았다 했다. 왜 한국 대통령이 일본 총리에게 조롱당하는지에 대한 해답이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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