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11.09 18:57
수정 : 2015.11.09 18:57
냉전이 끝난 뒤 열강들의 지정학적 대결도 종말이 온 듯했다. 미국의 주도 아래 다자간 협상과 협력이 국제질서의 주축이 될 것으로 생각됐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그런 기대를 부수기 시작했다. 지난해부터 세계는 다시 위험스런 지정학 게임의 시대로 돌입했다.
첫째,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내전이다. ‘포스트 냉전’, 즉 냉전 이후 시대의 상징인 러시아 국경은 다시 팽창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지정학적인 안보의 취약성을 영토의 팽창으로 보완해왔다. 변방을 넓혀 완충지대를 만들었다. 서방은 이런 러시아의 숙명적 팽창주의를 다스리지 못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때 약속이었던 나토의 현상유지 약속을 깼다. 우크라이나마저 유럽연합 가입을 시도하자,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합병하고 우크라이나 동부를 독립시키는 내전으로 대응했다. 러시아는 내친김에 시리아 내전에 개입했다. 오랜 꿈인 중동 진출 교두보를 확보하려 한다.
둘째, 러시아의 시리아 내전 개입은 중동의 지정학 판도의 격변을 가속화하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 실패는 중동의 거대한 세력 공백을 낳았다. 그 속에 사우디아라비아를 필두로 한 수니파 아랍국가, 이란이 주도하는 시아파 연대, 이슬람주의 무장세력 등 3자가 혼전한다. 미국 등 서방이 후원하는 수니파 국가, 러시아가 가담한 시아파 연대, 두 진영 사이에서 커지는 이슬람국가(IS) 등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은 중동의 지도를 다시 그린다. 시리아와 이라크는 사실상 해체됐다. 이라크의 시아파 세력권, 이라크와 시리아의 수니파 세력권,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 세력권, 시리아 동부의 알라위파 세력권으로 나눠지고 있다. 그 파장은 예멘의 시아파 후티 반군 세력권 등 다른 중동국가 체제도 허물고 있다. 밖으로는 난민위기를 낳고 있다.
셋째, 난민위기 등은 독일이 좌지우지하는 유럽 지정학 판도의 취약성을 재촉한다. 그리스 부채위기에서 드러난 유럽에서 독일의 압도적 영향력은 ‘독일의 유럽’이라는 우려를 낳았다. 독일은 자신의 기준으로 유럽을 이끌려 한다. 독일 헤게모니에 대한 우려는 난민 대처를 놓고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 제안 등 유럽연합 위기로 드러난다. 독일, 프랑스, 영국은 앞다투어 중국에 구애하고 있다. 이는 미국과 서유럽 동맹의 이완을 낳고 있다.
넷째, 미국 주도 동맹의 이완은 포스트 냉전 시대 지정학적 다툼의 핵심인 미-중 대결을 격화시킨다. 최근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남중국해 인공섬 수역에서 미국 전함의 항해로, 두 나라의 지정학적 경합은 물리적 충돌도 불사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는 좁게는 남중국해, 넓게는 태평양의 제해권, 본질적으로는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을 건 지정학적 대결의 시작이다.
이 사건을 전후해 경쟁적인 영국과 프랑스, 독일의 중국과 정상외교와 대규모 경협, 유라시아를 육지와 해로 양쪽에서 연결하려는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미국의 패권을 심각하게 위협할 가능성을 높였다. 미국은 남중국해에서 중국과의 대치를 서둘러 선택했다. 이완하는 동맹국들에 대한 압박이자, 실질적인 중국 봉쇄 정책이다. 또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추진으로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에 맞서고 있다.
이라크 전쟁의 실패로 본격화된 포스트 냉전 시대의 지정학적 판도 변화와 대결은 남중국해에서 열전의 가능성을 재촉한다. 중국의 도전에 대한 미국의 응전은 먼저 그 지역 동맹의 재구축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을 가상 적국으로 하는 일본의 역할을 키우고, 한국을 여기에 일체화시키려 한다. 앞으로 미국에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이 추세는 강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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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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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유일하게 요청한 것은 우리는 중국이 국제규범과 법을 준수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만약 중국이 그렇지 못한다면 한국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포스트 냉전의 지정학 게임에서 한국은 가장 먼저 명시적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에 자신들의 지정학 게임을 풀어갈 첫 약한 고리가 되고 있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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