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죽은 자들의 웅성임이소마에 준이치 지음, 장윤선 옮김/글항아리 펴냄(2016) 아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은 그 계절이 돌아오면 앓는다고 한다. 이제 4월이니 세월호 유가족들은 몹시 아플 것이다. 꽃 피는 공원 한구석에서 들리지도 않는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진실의 힘에서 출간한 <세월호, 그날의 기록>을 읽을 때 실은 나도 아팠다. 아이들은 너무나 구체적으로 살아 있었다. ‘안개 너무 쩔어서 배 안 떠’ ‘안 가면 옷 사고 장기자랑 준비하고 한 애들은 뭐가 돼 진짜’ ‘꺄노 꺄하 배 간다 배가 가!!! 배가 가!!!’ ‘응 나도 사랑해. 엄마 없어서 괜찮지 않아. 잘자. 쪽’ ‘방송에서 가만히 있으라잖아. 그러니까 가만히 있자.’ ‘집 가고 싶어. 무서워.’ ‘엄마 아빠 배가 많이 기울어졌어요. 보고 싶어요 ㅠㅠ’ ‘아빠 지금 저희 층 구조하고 있어요. 보고 싶어요. 사랑해요.’ 내가 만난 세월호 유족들은 치아를 많이 잃었다. 이를 너무 악물어서라고 누군가 내게 설명해줬다. 유족들은 시력도 많이 손상되었다. 눈물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라고 누군가 내게 설명해 주었다. 고통은 이렇게 벌써 몸에 흔적을 남겼는데 아무리 겪어도 충분치가 않다는 듯 계속 찾아온다. 유족들은 4월의 온기 속에서 한기를 느낀다. 가장 참담한 것은 이것은 충분히 피할 수 있는 비극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우리는 상황이 지금과 다를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온갖 표현으로 끝까지 묻고 또 물어야만 한다. 이소마에 준이치가 지은 <죽은 자들의 웅성임>은 3·11 동일본 대지진 이야기지만 내게는 세월호가 떠올랐다. “아이들은 숨을 참으며 4층 옥상으로 뛰어올라갔다. 학생 한명이 옥상난간에 붙어서 눈물 범벅이 된 채 할아버지 하고 소리쳤다. (…) 다른 아이들도 울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엄마에게 보이지 않는 아빠에게 계속 소리치고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는 아주 작습니다. (…) 오른쪽으로 가는 것이 좋았을까 왼쪽으로 가는 것이 좋았을까. (…) 모든 사람은 필사적으로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죽은 자들의 웅성임>에 나오는 재난지역 사람들과 세월호 유족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 있을 때 모습 그대로 기억하고 싶어한다는 것. 자신의 마음이 죽은 아이들에게 언젠가는 닿으리라는 생각으로 버틴다는 것. 마지막 순간에 대화를 할 수 있었으면 과연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수십번 상상한다는 것. “지금 죽은 그녀들에게 묻고 싶다. 그때 가장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이었냐고.” 정말 그때 가장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을까? 혹시 우리가 늘 하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을까? 산 자가 죽은 자를 잊지 않고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자기 자신 속에서 숨죽여온 또 다른 인생과의 대화’를 하는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그렇게 살아서 좋은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정말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될까?’ 무기력한 날, 잔인할 정도로 빈곤한 고정관념으로 입이 틀어막힌 유족들은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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