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세사르 바예호 지음, 고혜선 옮김/문학과지성사(1998) 오늘은 아무도 모르게 슬픈 날이다. 내가 이렇게 슬퍼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 참 좋은 일이란 것을 안다.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죽어가는 세상에서, 진실을 알려는 욕구가 무차별적으로 공격받는 세상에서, 소중한 가치를 믿는 사람이 이해관계를 믿는 사람들 손에 죽도록 모욕당하는 세상에서, 언어가 농락당하는 세상에서, 미소짓고 장난치고 키스할 수도 있는 입술이 상처 입히는 말을 쏟아내는 입술로 변하는 세상에서, 슬퍼할 줄도 모르는 인간이고 싶지 않은 나는 오늘 슬픈 것이 나에게 참 좋은 일이란 것을 안다. 진실이나 진리, 가치, 영혼 따위는 아무 소용 없다는 듯이 살 수는 없다고 다시금 깨닫는 날, ‘내가 남보다 중요한 이유가 하나라도 있는가?’ 물을 수 있을 만큼 공정해지고 싶은 날, 산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에 진지했기 때문에 깊이 슬퍼할 줄 알았던 시인의 시를 읽는다. 희망은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같은 거짓 낙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깊이 괴로워하고 고통받고 슬퍼하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흔들릴 때마다 사랑으로 중심을 잡으려고 했던, 세상에 팬 구멍마다 사랑의 방정식을 대입해서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던, 세상과 깨끗한 관계를 맺으려고 했기에 내적으로 아름다웠던,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다른 가난한 이가 이 커피를 마시련만”이라며 자신이 태어난 사실까지도 용서를 구하고 싶어했던 선량한 인간, 세사르 바예호를 읽는다.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그러나 뜨거운 가슴에 들뜨는 존재/ 그저 하는 일이라곤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어두운 포유동물/ (…) 인간이 진정 하나의 동물이기는 하나 고개를 돌릴 때/ 그의 슬픔이 내 뇌리에 박힌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 내가 사랑함을 알고/ 사랑하기에 미워하는데도,/ 인간은 내게 무관심하다는 것을 이해한다고 할 때(…)/ (…) 손짓을 하자 내게/ 온다./ 나는 감동에 겨워 그를 얼싸안는다/ 어쩌겠는가? 그저 감동, 감동에 겨울 뿐이다.”(‘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중에서)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이미 수없이 실망을 경험한 채로 연대와 희망을 외치는 지치고 사랑스러운 얼굴들이 떠오른다. ‘어쩌겠는가’ 이 말 앞에 얼마나 많은 뒷걸음질이, 실망이, 좌절이, 서러움이, 억울함이, 비통함이, 모색이, 관대함과 용기와 기대와 그리움이 있는지. 마침내 다시 얼싸안을 한 인간이 나타날 때 얼마나 큰 감동이 있는지. 이렇게 해서 이 슬퍼할 줄 아는 얼굴들은 또다시 얼마나 큰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는지(인간을 사랑하고 믿고 상처받는 위험, 그렇게 힘들게 자신을 알고 만들어가는 위험). 이상한 것은 이 얼굴들이 오늘처럼 슬픈 날, 내게 용기를 주고 내가 할 일을 알려준다는 점이다. 내가 슬퍼할 수 있다면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나는 오늘 누군가를 안고 싶다. 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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