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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2.22 18:40 수정 : 2016.12.22 18:52

정혜윤의 세벽세시 책읽기

비수기의 전문가들
김한민 지음/워크룸프레스(2016)

김한민 작가의 그래픽 노블 <비수기의 전문가들>은 우리가 익히 아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넌 알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영 해답을 모르겠으니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다시 시작해 볼까? 주인공은 한국을 탈출해서 다른 곳으로 갔다. 그런데 가자마자 또 질문이 터져나왔다. “여기서 무슨 짓이냐. 이게 다 무슨 의미냐.” 주인공은 이 골치 아픈 질문을 버리지 않기로 했다. 버리는 대신 실험을 하기로 했다. 가진 것은 삶뿐이므로 삶으로 실험을 하기로 했다. 햄릿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라고 했지만 주인공에게는 ‘어떻게 사느냐?’ 그것이 죽기 살기로 매달릴 문제였다.

뭔가 의미있게 살 방법을 찾아냈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얼른 더 읽고 싶은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는 이제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우울한 얼굴의 손님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중간에서 책을 잠시 멈춘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초보자 클래스’였음을 알린다. 다음 단계로 어서 넘어가고 싶은 독자들이 초보자 클래스의 끝에 대면하게 되는 문장이 있다. ‘쓸 뿐 살지 않는다.’

이 문장은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변주해서 음미할수록 양심의 가책으로 남몰래 뺨이 빨개진다. 말할 뿐 살지 않는다. 알고 있다고 할 뿐 살지 않는다. 남들에게 권할 뿐 나는 살지 않는다. 공감하자고 할 뿐 내가 겪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할 뿐 실천하지 않는다. 마음은 있는데 몸이 안 따른다 등등.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거룩하게 깨닫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실제로 일상을 사는 모습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말일 수도 있을까?

좋은 책은 세상의 인구를 한명 늘리는 것과 같다. 이 책도 지상에 새로운 ‘반대자' 한명을 추가했다. 공감이 아니라 비공감주의(무언가가 진짜일수록 공감하기 어렵다는 주의)의 창시자, 지속가능성을 의심하는 자(삶을 중산층 평균으로 올리는 것이 인류의 목표라지만 지속가능하게 해야 할 삶의 모습이 고작 더 큰 아파트나 차를 갖는 것에 불과하다면?), 만사의 (이득이 아니라)가치를 음미하려는 자, 만사를 실감하려는 자,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없는 그대로 당당한 자, 세상을 작동시키는 원리가 아니라 세상에서 작동을 멈춘 원리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자, 그토록 자기 삶의 의미는 갈구하는 사람들이 왜 다른 생명이 무의미하게 파괴되는 것은 지켜만 보는지 묻는 자.

이 책은 사회가 기대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려고 했기 때문에 이쁨이 아니라 미움을 받아 본 자, 자기 삶을 걸고 실험해 볼 용기가 있는 자, 삶을 의미있게 구축하기 위한 지루한 고군분투를 감당하려는 자, 이 세상에 소중히 여길 만한 무언가를 찾아내고 존재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자, 마침내 마음이 가는 방향을 찾아냈을 때 뛰어갈 수 있는 자, 그러나 희망의 잔은 쓰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거창한 의미부여를 경계하는 자, 사람들을 무의미로 추락시키는 세상의 원칙을 하나라도 바꿔보려는 자, 이런 사람들에게 불을 붙일 것이고 언젠가는 상대방의 모습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는 친구가 될 것이다. 다른 세상은 다른 삶이 있어야만 가능하므로 이 책을 2016년 촛불시민의 필독서로 권한다.

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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