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아연 소년들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문학동네(2017)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아연 소년들>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혼자서 이 길을 가요. 이제 오래도록 홀로 이 길을 가야 해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왜 혼자 오래 길을 가야 할까? 그 사연은 바로 뒤에 이어진다. “그 아이가 사람을 죽였어요. 내 아들이. 주방용 손도끼로. 내가 고기를 토막 내는 데 쓰는 그 도끼로요. 전쟁터에서 돌아와 사람을 죽인 거예요. 아들은 아침에 부엌 찬장에 손도끼를 다시 갖다 놓았어요.” 어머니는 아들이 왜 살인을 했는지 이유를 찾아 홀로 사방을 헤맨다. <아연 소년들>은 전쟁터에서 죽어 아연관에 담겨온 소년 병사들을 말한다. 그 소년들은 죽기 얼마 전까지도 소련에서 9학년에 다니던 아이들이었다. 죽어갈 때는 하나같이 “엄마”를 불렀다. 책 속에는 아프간에 파병되었던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그 목소리는 자신이 겪은 일을 표현할 말을 찾는 데 고통을 겪는다. 한 병사는 병원에서 깨어나 제일 먼저 팔이 붙어 있나 만져보고 안심하고 그 다음에 다리가 붙어 있나 만져보고 다리가 없는 것을 알고는 기절해버리고, 다른 병사들은 고문당해 팔다리 없이 몸통만 돌아온 사람을 본 것을, 지뢰로 너덜너덜해진 시신을 양동이에 담았던 것을, 무엇보다도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밖에 결코 잊을 수 없는 많은 일들. “전투 중에 한 병사가 자기 몸을 던져 나를 살렸어요. 내 숨이 붙어 있는 한 그 사람을 기억할 거예요. 그 사람은 나를 전혀 몰랐어요. 그런데도 내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희생한 거예요. 그런데 다른 이야기도 있어요. 한 병사가 저에게 상소리를 하더라고요. 지옥에나 떨어져라! 속엣말을 했죠. 그 병사는 잠시 후에 죽었어요. 머리와 몸통이 반씩 떨어져나가서요. 바로 내 눈 앞에서요.” 이런 이야기들은 동요하지 않는 마음의 평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뒤흔든다. 그 또는 그녀들의 슬픔이 뇌리에 깊이 박힌다. 한 사람이 겪은 고통은 극도로 구체적이라서 어떤 추상에도 꿰어맞출 수 없다. 삶은 너무나 복잡해서 손쉬운 해결책이란 없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글을 읽을까? 왜 타인에게 벌어진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 왜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까?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이런 잔혹한 일이 더 이상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꿈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도 질문은 남는다. 우리가 타인의 삶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귀 기울이고 상상해봐야 할,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가? 아마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사실은 뭐라고 대답해도 딱 떨어지지 않고 부족하다. 하지만 타인의 삶이 복잡하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잘 알게 되고, 그 복잡함 속으로 한발씩 걸어 들어가는 것은 타인을 쉽게 단죄하거나 규정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다. 한 사람에게 우리의 이해와 공감의 폭만큼, 그만큼 더 숨 쉴 공간을 넓혀줄 수 있다. 그 공간 속에서 누군가는 겨우겨우 살 힘과 용기를 얻고 몸을 펼 수도 있다. 그런데, 덧없고 약한 인간들이 모여 살면서 주고받을 수 있는 이만한 선물이 또 있겠는가? 정혜윤 〈CBS〉(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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