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필립 마이어 지음, 최용준 옮김/문학동네(2018) 놀라운 데뷔작이라는 필립 마이어의 <아메리칸 러스트> 를 읽기 시작한 것은 ‘러스트’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나는 러스트 벨트라는 말을 트럼프 대통령 당선 때 처음 들어봤다. 러스트 벨트는 한때는 아메리칸 드림이 먹히던 곳이었다. 일만 잘하면 누구나 해고될 걱정 없이 좋은 임금을 받고 근사한 집 한 채를 마련할 수 있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두 집 건너 한 집은 폐가가 되거나 ‘집 팝니다’라는 광고가 걸린 곳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러스트 벨트를 떠났고 사라져갔다. 삶이 어찌나 초라하던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남들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속마음을 품고 살게 되었다. 필립 마이어는 자기 기만적인 행동, 그릇이 적은 사람의 행동, 남의 희생을 대가로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의 행동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사실 러스트 벨트는 늘 아름다웠다. 푸른 구릉이 있고 어디서나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디서나 곧 꽃이 피고 향기가 날릴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풋볼 스타였던 청년 포는 남들이 보기엔 불같은 기질을 죽이지 못하고 대충 사는 녀석이지만 그 지역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낄 줄도 안다. 방안의 커튼봉은 망가졌지만 그 덕에 저 멀리 강끝까지 볼 수 있는 점은 좋은 것이다. 포에게는 공부를 아주 잘했던 아이작이란 친구가 있었다. 아이작은 포 말고는 친구라 할 사람 없이 외로웠다. 그가 외로운 것은 자기 존재보다도, 자기 삶보다도 큰 것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삶의 의미, 진실 같은 것. 그것은 남을 위해서 뭔가를 희생하면 너무 많은 것을 잃게 된다고 배운 사람들에게는 낯선 생각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5년이나 지나 아이작이 고향을 떠나기로 한 날 포는 아이작을 배웅한다. 비 내리던 그날 밤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위기에 빠진 포를 구하기 위해 아이작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다. 목격자는 살인을 저지른 것은 ‘포’라고 지목한다. 이제 포는 어떻게 행동할까? 아이작은? 이보다 더 나쁜 상황은 상상하기가 힘든데도 후반으로 갈수록 오히려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배경은 황량하고 상황은 절망적인데도 마음은 정성껏 사랑받은 인간의 몸을 상상하게 된다.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뭔가를 지키려 한다. 뭔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포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진실이 있다. 포는 자살하려고 강물에 몸을 던진 아이작을 구한 일이 있었다. 포는 늘 나쁜 선택을 했지만 그의 선택이 좋았던 적이 있다면 아이작을 구하기 위해 차가운 강물에 몸을 던졌을 때였다. 그것은 포가 한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이었고 포는 그 일을 절대 망치고 싶지 않다. 포는 아이작에 대해서 결코 말하려 하지 않는다. 포의 어머니 그레이스를 사랑하는 경찰서장 해리스가 있다. 해리스는 생각한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이 있다, ‘그레이스 같은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런 사람 중 하나를 아는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다.’ 해리스의 이 생각에서 소설은 놀라운 반전을 겪는다. 필립 마이어는 아무리 바라봐도 희망이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평화와 희망을 만들어냈다. 꼭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이것이 마음의 평화였다. 상황이 어떻든 서로 구하고 중요하게 여기고 지킬 줄 아는 것, 이것이 희망이었다. 정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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