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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8.30 19:43 수정 : 2018.08.30 20:03

[책과 생각]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문학동네(2018)

어떤 소설은 정말 좋은 질문을 던진다. 다비드 그로스만의 소설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는 조기 은퇴한 법관이 어린 시절의 친구라고 주장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 도발레에게 전화를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판사는 도발레에 대해서 아무 기억도 없는데 도발레는 둘의 우정이 그의 인생에서 회고할 만한 가장 가치 있는 일이었던 것처럼 애착을 가지고 말한다. 도발레가 요구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의 쇼를 봐달라는 것이었다. 대체 그는 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일까?

도발레에게는 알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나한테 있는 게 뭔지 네가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아. 내 말은 있잖아, 사람들이 나를 볼 때 뭘 얻느냐는 거야. (…) 어떤 사람에게서 제어 불가능하게 그냥 흘러나오는 거 있잖아. 세상에서 오직 이 한 사람만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 그거.” 그런데 그것이야말로 오래전 판사가 모든 사람들에게서 찾겠다고 맹세한 것이었다. 일이 잘못되고 뒤틀렸다고 해도 그 너머 그 사람에게 있는 고유한 것. 내적인 빛과 어둠, 진동처럼 전해지는 고유성. 이렇게 해서 판사는 도빌레의 쇼에 가서 앉아 있게 된다.

쇼의 출발은 아주 진부했다. 무인도에 동물 몇 마리와 표류하게 된 남자와 관련된 성적인 농담 같은 것. 판사는 도발레의 시선을 피하면서 어서 빨리 나갈 궁리를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도발레의 지독한 농담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둘은 아주 각별한 사이였던 것이다. 수학 과외를 마치고 둘이서만 버스정류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도발레는 늘 엄마를 데리러 가야 한다고 말하곤 했었다. 그런데 왜 아이가 엄마를 데리러 갈까? 그 시절엔 그것을 묻지 않았었다. 도발레는 엄마를 데리러 갈 때 늘 물구나무를 서서 걸어갔다. 이유가 있었다. 도발레의 엄마는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였다. 엄마는 사람들이 비뚤어진 마음으로 자신을 본다고 생각하고 땅만 보면서 걸었지만, 도발레가 물구나무를 서서 걸으면 아무도 더 이상 엄마에 대해 말하지 않고 엄마를 흘끔거리지도 않고 다들 도발레만 봤고 엄마는 비로소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도발레의 코미디쇼는 점점 웃음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정점은 도발레가 캠프에 갔을 때였다. 캠프의 거의 모든 아이들에게 얻어터지고 왕따 당하던 도발레는 가족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누가 죽은 걸까? 엄마일까? 아빠일까? 어린 시절의 판사 역시 그때 캠프에 있었지만 도발레가 교관을 따라 황급히 캠프를 떠날 때 그에게 달려가지 않았다. 그러나 판사는 이제야 깨닫는다. 그에게 달려가 물어보았어야 한다. “나는 그의 친구였다. 안 그런가?” 이제 코미디쇼는 다소 난장판이 된다. 누군가는 홀로코스트 이야기는 집어치우라고 외치고 누군가는 경험을 나눌 수 있기를, 그렇게 치유되기를 갈망한다. 판사는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여기에서 그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지 자문했다. 내가 그를 위해 뭐가 될 수 있을까?”

도발레가 판사에게 던진 질문, “사람들이 나를 볼 때 뭘 얻느냐는 거야.”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주 소중하다. 도발레는 타인에게 일어날 일을 더 궁금해할 기회, 타인의 입을 막지 않을 기회, 타인의 슬픔에 깊게 공감할 기회, 한 인간을 한 인간으로 볼 기회, 그리고 우정을 되찾을 기회를 주었다. 이것은 좋지만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타인이 준 슬픔과 서러움, 상실, 손해의 기억 또한 있으므로.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런 슬픔 때문에 연결된다.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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