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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05 06:00 수정 : 2019.04.05 20:00

[책과 생각]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말하는 보르헤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민음사(2018)

올 초에 세월호 전 집행위원장 현 (자칭) ‘리베로’ 유경근 선생님에게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달력이었다. “무슨 달력이에요?” 무심코 건네받았다가 ‘아뿔싸!’ 싶었다. 달력에는 세월호에서 희생된 아이들, 선생님, 김관홍 잠수사, 그리고 세월호를 촬영하던 중에 사망한 박종필 독립영화감독의 생일이 표시되어 있었다.

달력 속에서 아이들은 전 세계를 여행중이었다. 지면 관계상 (정말 싫지만) 몇 명만 무작위로 옮겨 적어보겠다. 1월5일 직접 만든 빵을 나눠주는 것을 좋아하는 천인호 / 11일 성적우수 장학금을 받아 부모님 결혼 20주년 여행을 보내드린 신승희 / 13일 어머니가 출근하는 주말이면 도시락을 싸드리는 김민정 / 3월1일 아버지의 휴대폰에 내 심장이라고 저장되어 있는 귀한 4대 독자, 작사 작곡을 잘하는 남현철 / 3일 늦은 밤 어머니가 퇴근해서 오시면 꼼꼼하게 안마해 드리는 엄마의 영원한 보디가드 정원석 / 11일 학교에 가장 먼저 출근해서 학생들 등굣길 지도를 하시는 양승진 선생님 / 21일 부모님이 힘들게 버는 돈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다던 김민성/ 6월19일 편찮으신 어머니를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다니면서도 늘 웃고 사회복지사를 꿈꾸는 정이삭/ 7월4일 우리 애기들 살려야 해요, 마지막까지 학생들 생각을 먼저 한 전수영 선생님 / 25일 아버지께 물려받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카메라 감독을 꿈꾸는 한고운 / 10월29일 어머니와 밤새 수다떠는 딸, 중국어를 좋아해서 중국어 번역 일을 하는 것이 꿈인 황지현 / 11월20일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엄마인 줄 알고 문을 먼저 여는 아이, 컴퓨터 관련된 일을 하고 싶은 이승민 / 12월6일 형과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형제 요리사를 꿈꾸는 손찬우….

이름 하나하나가 사랑과 꿈처럼 느껴진다. 꿈 하나하나마다 어린 영혼과 얼굴과 이름이 담겨 있다. 마치 시나 아름다운 음악을 옮겨적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이 노래가 들리게 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슬픔이 끝없이 밀려온다. 하지만 또 다른 생각도 든다. 달력에는 아무도 과거형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꿈은 현재형이다. 부모들은 세상 온갖 일로부터 아이들의 꿈을 지키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할 것이다, 아이들의 가장 좋은 모습과 목소리가 우리들의 삶 안으로 흘러들어가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말 걸기를 멈출 수도 없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전에는 물어보지 않았던 것들을 물어보고 의견을 구할 것이다.

“아들, 딸, 엄마 아빠가 이렇게 하는 게 맞니?” “할 거면 제대로 하세요.” “응 그렇게 할게.”

이것이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이고 용기를 내는 방식이다. 부모들은 더 이상 만져볼 수 없는 희미해져가는 얼굴에서, 아이들의 꿈에서 자신의 얼굴과 꿈을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세월호 5주기를 앞두고 보르헤스의 말을 떠올린다.

“나는 불멸을 믿는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개인의 불멸은 믿지 않지만 우주적 차원의 불멸은 믿습니다. 우리의 육체적 죽음 너머로 우리의 기억이 남을 것이며 우리의 기억 너머로는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상황 그리고 우리의 태도가 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주 역사의 가장 멋진 부분이 모두 남을 것입니다.”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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