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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03 06:00 수정 : 2019.05.03 19:46

[책과 생각]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긴 여행의 도중
호시노 미치오 지음, 박재영 옮김/엘리(2019)

지난달 칼럼에 세월호 달력 이야기를 썼는데, 이달에는 다른 달력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고 싶다. 세월호 달력을 받고 나서 나는 또 다른 달력 하나를 선물받았다. 생명다양성재단에서 만든 달력이다. 이 달력의 주인공은 온갖 동물들이다.

5월을 예로 들자면 2일은 세계 참치의 날, 3일은 국제 야생 코알라의 날, 4일은 국제 닭 존중의 날, 8일은 세계 당나귀의 날, 15일은 국제 캥거루 돌보기의 날, 18일은 멸종위기 종의 날, 20일은 세계 참새의 날, 22일은 국제 생물 다양성의 날, 23일은 세계 거북이의 날 겸 핑크 플라밍고의 날, 29일은 세계 수달의 날이 있다. 6월2일은 국제 동물원 코끼리를 위한 행동의 날, 14일은 살아 있는 동물 운송 금지의 날 등이 있다.

이런 날들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이런 날들이 있어서 기분이 좋다. 이 달력대로 산다면 하루하루 뭔가를 돌보고 존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 같다. 이 달력에는 달마다 그림이 있다. 3월의 그림 속에서 동물(거대 개구리)과 인간이 춤추듯이 기쁨에 겨워 부둥켜안고 있다. 그 그림에서 끝장내버린 것은 고독이다. 인간의 고독은 끝났다. 동물의 고독도 끝났다. 어머, 너 여기 있었구나. 이게 네 뱃살? 이게 네 뺨? 이게 네 날개? 이게 네 털? 서로에 대한 반가운 확인은 열두 달 내내 계속된다. 오늘이 너의 날? 오늘이 너가 존중받는 날? 어디 갔다가 이제 나타났어? 어디 안 갔다고? 내가 그동안 못 본 거라고? 좋아. 고통스러운 시간은 이제 끝났어! 우리 함께 있잖아. 우리의 몸이 함께 있잖아. 이제 알았어.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서로의 몸이야! 무시당하고 고통스러운 몸도 서로 안고 있으니 좋다. 정말이니? 나도 너랑 안고 있으니까 따뜻하고 좋아! 너, 냄새 좋다!

서로 사이에 있는 빈 공간, 나와 세계 사이의 빈 공간,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빈 공간의 고독이 이런 포옹으로 채워졌으면 좋겠다. 포옹의 글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를테면 이런 글들.

알래스카에 살던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는 여든 살을 앞둔 두 여장부 셀리아와 지니와 함께 알래스카 깊은 곳을 흐르는 신제크 강을 여행하기로 했다. 두 여인에게는 그 여행이 어쩌면 마지막 여행이 될 수도 있었다. 신제크 강에 도착하자 모두들 아이들처럼 신났다. 호시노 미치오는 부지런히 작은 나무를 모아 모닥불을 피울 준비를 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지니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말했다.

“미치오, 뭐해요?” “불을 피우려고요.” “그렇게 추워요?” “…”

“잘 봐요. 이 강변에 얼마나 유목이 적은지, 우리가 하룻밤 모닥불을 피우는 것만으로 이곳의 유목을 다 쓰고 말 걸요?”

나무가 자라지 않는 툰드라에서 강을 타고 내려오는 약간의 나무들은 귀했다.

“아크틱 빌리지에 사는 인디언들이 겨울에 이 골짜기를 여행할지도 몰라요.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 모닥불이 정말로 필요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 글을 읽고 난 뒤 나에게는 “그렇게 추워요?” 자꾸만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마침내 “그렇게”를 아주 잘 발음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발음을 할 때마다 두 여인과 호시노 미치오의 길게 뻗은 팔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그 팔은 포옹 직전이다. 그 팔은 장차 곤경에 처할 수 있는 생명을 포옹하려고 한다. 그런 포옹이 있는 곳에 미래가 있다.

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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