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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22 05:59 수정 : 2019.11.22 14:21

[책&생각]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문학동네(2018)

올 한해 내 온 마음과 시간과 에너지를 잡아먹은 책이 한 권 있다. 2014년 맨부커상 수상작,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호주군 포로의 아들이기도 한 작가 리처드 플래너건은 타이(태국) 콰이강의 다리에서 강제노역을 당하던 포로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 소설은 여러모로 내 마음을 강력하게 끌었다. 우선 인생의 재료라는 측면!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뿐만 아니라 프리모 레비나 헤르타 뮐러의 글처럼 전쟁 중 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문학에 결코 빠지지 않는 세 가지 재료가 있다. 

‘굶주림’ ‘폭력’ ‘똥’이다. 여기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생 이야기들이 나왔다. 굶주림이 시작되는 곳, 거기서부터 인간의 품위는 끝장난다. 누구나 도둑질을 했고 누구나 쓰레기통을 뒤졌다. 폭력이 시작되는 곳, 거기서 비겁함과 용기, 죄책감과 정당화의 숱한 이야기가 나왔다. 똥에서는 인간 존엄의 이야기가 나왔다. 말라리아, 이질, 콜레라에 걸려 설사를 하는 환자라도 똥은 화장실에서 누려고 했다. 우리 중 누구도 굶주림, 폭력, 똥을 재료로 인생 이야기를 써나가고 싶지 않겠지만 포로들은 그렇게 해야 했다. 리처드 플래너건은 굶주림, 폭력과 똥을 재료로 우리가 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상상하게 만드는 소설을 썼다.

사랑과 용기는 어떤 특별한 사람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고 그것이 없으면 다 죽는다는 것이 작가의 믿음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평생에 걸쳐 단 한 번도 사랑을 주지도, 받지도 못한 사람이 나온다. 그는 조선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조선인 포로감시원. 조선인 포로감시원이 곡괭이자루로 포로를 구타하고 그 포로가 빈 포대자루처럼 생명체가 아니라 하나의 사물처럼 폭삭 무너져 내리고 결국 똥통에 빠져 생을 마감하는 장면은 읽기 힘들 정도로 비통하다. 그 숨막히게 긴 순간 포로들은 구타당하는 동료를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외면했다.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태평양전쟁이 끝나자 전쟁재판을 받고 전범이 되어 사형을 당한다. 그가 죽기 직전까지 생각한 것은 일본이 주기로 한 월급 50엔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이 소설에 사로잡힌 두 번째 측면이다. 인간이 돈 말고 달리 할 말도, 지킬 것도 없이 죽어가는 것은 진정으로 비참한 일이다. 사실 ‘천황’이나 일본의 정치지도자가 아니라 식민지 조선 출신 일본군 말단 포로감시원이 전쟁책임을 지고 처형까지 당한 일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었다. 이 전쟁재판과 책임의 문제야말로 현재 일본의 정신상태를 이해하는 데 가장 근원적 사건 중 하나이다. ‘천황도 책임지지 않는데 다른 사람은 뭐….’ 당시 전쟁재판을 지켜보던 많은 일본인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무책임을 편안하게 받아들였어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2019년 여름, 나는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의 바로 그 포로감시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연합국이 만든 싱가포르 창이 형무소 간이 교수대에 서지 않고 살아남은 ‘그’를 도쿄에서 만났다. 가장 중요한 질문거리는 이것이었다. 역사 혹은 어떤 사회적 상황은 우리를 짓누른다. 우리를 꼼짝 못하게 묶어 놓고 그 상황 속에서 그래도 가장 합리적인 뭔가를 선택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올바른 줄 알고 한 선택이 자기 자신의 삶을 파괴한다면? 일단 살아남아 다시 삶을 선택할 기회를 가졌다면 그때는 어떤 삶을 선택했는가? 우리를 짓누르는 역사의 힘에 뭉개지지 않고 개인의 역사를, 자신의 삶을 살아낼 만큼 용감할 수 있었는가?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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