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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26 17:50 수정 : 2019.04.27 14:22

김영준
열린책들 편집이사

몇해 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때의 일이다. 어느 프랑스 저자가 자기 책을 낸 각국 출판사 사람들에게 저녁을 산다고 연락해왔다. 가보니 생각보다 격식을 차린 엄청난 테이블(대략 카녜이 웨스트의 <런 어웨이>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것 같은)이 있고 내 자리는 저자 옆의 옆이었다. 참석자들은, 옆의 독일인을 포함하여 모두가 프랑스 말을 잘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대화의 언어는 곧 영어로 바뀌었다. 프랑스 말을 못하는 나를 배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절반은 프랑스 출판사 사람들이었는데 자기들끼리도 이제 영어로 하는 것이었다.(사실 나는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프랑스 말을 못하는 죄로 방에서 영어를 제일 못하는 것까지 들켜야 한다는 건 너무한 일이었다.)

모두의 배려심과 그에 한참 못 미치는 나의 영어 실력이 만들어낸 불안한 균형은 늦게 도착한 어느 남유럽 편집자에 의해 깨졌다. 참석자 다수와 구면인 듯한 그녀는 앉자마자 프랑스 말로 이야기했고, 굳이 영어로 말을 거는 프랑스인들의 시도를 간단히 무시했다. 테이블은 이제 그녀 주변의 프랑스어권과, 여전히 서로 영어로 대화하려 애쓰는 사람들로 나뉘게 되었다. 문제의 그녀는 가끔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국적은 밝히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이 일화의 진짜 주제를 깨달은 것은 꽤 나중의 일이다. 핵심은 내가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말을 못하는 유일한 사람이 나였기 때문이다. 나를 배려하여 영어를 유지하려 애쓴 프랑스인들의 처신은 훌륭하다. 그러나 기본 이상의 것은 아니다. 문명인의 규칙을 지키려면 그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타자를 제쳐두고 친구끼리 떠들면 안 되지 않는가?

그 남유럽 편집자는 왜 지인들과 편하게 프랑스어로 대화하지 못하고 영어 연극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간 듯하다. 그리 명백한 것을 어찌 모르나 싶지만, 너무 한심하게 볼 것은 없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정을 참지 못하며, 이 세상을 친구가 모인 놀이터, 확장된 동문회장으로 보는 태도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1)다른 사람과 이야기 중인데 갑자기 나타나서는 추억과 사적인 농담을 늘어놓으며 나를 만난 회포를 푸는 친구 (2)새 부서에 배치되어 갔는데 자기들끼리 너무나 다정해 보여서 나를 엄청 주눅 들게 하였지만 몇달 지나 보니 실은 별로 친하지도 않았고 그저 새로운 사람을 경계하느라 일시적으로 똘똘 뭉쳤던 것이 드러나는 회사원들 (3)시청자들 앞에서 위 기수를 ‘선배님’이라고 하며 친분을 드러내는 예능 프로그램 출연자 (4)공식 지면에서 지도 교수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사적인 언어로 인터뷰나 서평을 진행하는 대학교수 등등. 마지막 예들은 곤란한 문제를 제기한다. ‘선배님’과 ‘선생님’은 관계 밖의 타자를 즉각 소외시키는 호칭이지만, 사실 다른 호칭도 없지 않은가? 한국에서 연장자를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곤란은 우리가 해결할 문제이지 타자가 초래한 것은 아니다.

‘타자가 없는 척하지는 않는 것’이 대단한 일은 못 된다. 어렵지도 않다. 타자와의 거리만큼 친구와 떨어지면 된다. 사람들 사이의 이상적인 거리는 접어두자. 그저 공적 장소, 타자가 있는 곳에서는 그 거리가 균일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공정함을 이야기하고 타자를 포용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허용된 거리보다 근접해오는 친구를 막지 못하면 공정함도 포용도 불가능하다. 친구가 공간을 우정으로 채워버리면 타자는 바로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말없이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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