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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부산 동래구 수안동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동래읍성 유적. 처참했던 1592년 음력 4월15일 동래읍성 전투상황을 그대로 간직한 유적이다. 경남문화재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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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③ 동래왜성
2005년 4월 부산 동래구 수안동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건설현장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조선시대 동래읍성 주위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성곽 방어시설 ‘해자’가 발견된 것이다.
경남문화재연구원은 곧바로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성곽을 따라 땅을 길게 판 해자에선 철판을 이어 만든 갑옷과 투구, 환도, 창, 화살촉 등 전투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장 놀라운 것은 전쟁의 처참한 흔적이 남아 있는 사람뼈였다. 해자 밑바닥에선 남자 59명, 여자 21명, 어린이 1명 등 모두 81명의 뼈가 발굴됐다. 이 가운데 8명의 두개골에선 칼에 베이거나, 활이나 총, 둔기 등에 맞은 흔적이 드러났다
뒤쪽에 구멍이 뚫린 20~40대로 추정되는 남자의 두개골, 두 차례나 칼로 잘려나간 흔적이 남아있는 20대 여성 두개골 등이 발견됐다. 총이나 활이 관통한 5살가량 어린아이의 두개골도 나왔다.
고고학계는 발굴된 사람뼈의 평균키와 생김새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이들은 모두 조선인이며, 1592년 음력 4월15일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전투상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밝혔다. 임진왜란 유적에서 처음으로 사람뼈가 나온 것이다. 임진왜란 전 조선군 보급물품과 일본 창이 발견됐다는 점도 임진왜란의 전투 흔적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학계는 “5살가량 어린이 두개골에서 확인되는 상흔과 경사도, 깨진 정도를 종합하면 왜군의 조총 탄환이나 유탄을 맞아 숨진 것으로 보인다. 20대 여성의 전두골은 칼로 예리하게 잘려 있고, 두정골에도 칼로 베인 흔적이 있다. 각도를 볼 때 고개 숙인 여인을 왜군이 칼로 내리친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왜군에 끝까지 저항하다 스러져간 조선 백성들의 주검이 동래읍성 해자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것이다. 잊혀진 조선 백성들은 이렇게 400여년만에 세상에 나왔다.
■ 동래읍성 전투
왜군은 부산진성을 함락한 다음날인 1592년 음력 4월15일 부산의 국방·행정 중심지이던 동래읍성에 이르렀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동래읍성 남문에 올라 성문을 굳게 닫고 전투준비를 했다.
그러나 경상좌도의 육군사령관 격인 경상좌병사 이각은 구름같이 몰려드는 왜군을 보고 “나는 대장이니 성 밖에 있으면서 협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송 부사는 이곳을 지키시오”라며 성문을 열고 빠져나갔다. 부하들도 “일단 물러나서 험한 지형에 의지해 적을 막자”고 건의했다.
“성주가 성을 지키지 않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송상현 부사가 일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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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읍성 전투 장면을 묘사한 동래부순절도. 1760년(영조 36년) 변박이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송상현 동래부사가 왜군과 대치하는 모습, 경상좌병사 이각이 달아나는 장면 등이 그려져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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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 전투 81명 유골 나와
탄환에…칼에…처참하게 스러져
함락시킨뒤 그 돌로 왜성 쌓아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은 동래읍성을 에워싼 뒤 동·서·남쪽에서 공격했다. 전투를 시작하고 반나절 만에 왜군은 동래읍성 동북쪽 성벽을 파괴하고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성안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효종 때 동래부사로 재직했던 민정중이 1668년에 쓴 <임진동래유사>에서 “성은 좁고 사람은 많은데 적병 수만명이 일시에 성으로 다투어 들어오니 움직일 수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전북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은 임진왜란 야사 <난중잡록>에서 “송상현은 ‘이웃나라의 도리라는 것이 이런 것이냐? 우리가 너희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너희들의 이같은 침략행위가 도리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느냐’며 왜군을 꾸짖은 뒤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고 기록했다.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 권59)엔 왜장들도 송상현의 절의에 탄복했다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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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부산 동래구 수안동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동래읍성 유적. 처참했던 1592년 음력 4월15일 동래읍성 전투상황을 그대로 간직한 유적이다. 경남문화재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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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부산 동래구 수안동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동래읍성 유적에서 나온 두개골. 경남문화재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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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구 안락동 충렬사의 모습. 충렬사는 동래왜성 터와 맞붙어 있다. 김영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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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동래읍성 6배 규모로 건설
동장대서 나온 조선 기와 모양
왜군이 일본 돌아가 본떠 쓰기도 산책길을 따라 충렬사 뒤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길 양쪽에 편편한 공간들이 계단식으로 배치돼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은 “병사를 배치해 성을 방어했던 ‘곡륜’으로, 왜성 터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말했다. 동래왜성 2곽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엔 조선시대 군관들의 집무소인 군관청(부산시지정 유형문화재 제21호)이 들어서 있다. 동래구 수안동 동래교차로 근처에 있던 것을 1982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동래왜성 2곽 추정 지역을 지나 구릉 꼭대기로 올라가면, 1곽이 나온다. 전투지휘소인 천수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에 새 동래읍성의 동장대가 세워졌다. 해운대, 기장, 구포 등 부산 외곽으로 가는 길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동장대 동쪽 비탈엔 30~40m 길이의 해자가 보인다. 1979년 동장대 복원공사 당시 이곳에서 조선 기와가 나왔는데, 공교롭게도 임진왜란 때 왜군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일본에 돌아가 세운 구마모토(熊本) 무기시마(麥島)성 천수각에서 같은 제작틀로 만든 기와가 출토됐다. 나 팀장은 “동래에서 가져간 것을 본보기로 만든 기와를 일본성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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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구 칠산동에 있는 동래읍성의 동장대. 임진왜란 때 왜군은 이곳에 동래왜성의 전투지휘소인 천수각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영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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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왜성 2곽 추정지역에 있는 부산시지정 유형문화재 제21호 군관청. 조선시대 군관들의 집무소이다. 군관청은 동래구 수안동 동래교차로 근처에 있었는데, 1982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김영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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