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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과 남해를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가덕수로 전경. 왼쪽이 육지이고, 오른쪽 큰 섬이 부산 가덕도이다. 왜군은 가덕도에 왜성을 쌓아 가덕수로를 통과하는 조선 수군을 견제했다. 현재는 부산신항 건설을 위해 양쪽 해안 모두 매립돼 수로가 막힌 상태이다. 경남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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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⑨ 부산 가덕왜성과 지성
1509년(중종 4년) 음력 1월5일 조선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1508년 11월2일 웅천현(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의 조선 관리와 백성 등 9명이 인근 가덕도(부산 강서구 가덕도동)에 나무를 베러 갔다가 살해됐는데, 이 사건의 범인이 왜인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신이 방금 가덕도 사건을 추문했습니다. 가덕도는 바다 한 가운데 있고, 왜인들이 살고 있는 포소(웅천 내이포)와 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벌목을 하려고 가덕도 깊숙이 들어간 것을 왜인들이 보고 밤에 몰래 쳐들어가 변고를 일으킨 것입니다.” 경상도 경차관으로 파견돼 이 사건을 조사한 김근사는 조정에 이렇게 보고했다. 조선 조정은 군사 업무를 총괄하던 병조의 의견을 좇아 일본의 쓰시마 도주한테 이 사실을 알리고 엄중 경고했다. 또 조선 조정은 삼포에 거주하는 왜인들의 우두머리를 불러 범행을 저지른 왜인을 찾아내라고 명령했다. 1426년(세종 8년) 조선 조정이 우리나라 남해안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들을 회유하려고 삼포(부산 부산포, 웅천 내이포, 울산 염포)를 개항해 왜인과의 무역을 허락했지만 왜인들의 침탈은 점차 심해져 중종 때 절정에 달했다. 이에 1506년(중종 원년) 조선 조정은 삼포의 왜인들을 법규에 따라 엄격히 통제했는데, 이 와중에 가덕도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후 삼포왜란 등 크고 작은 왜인들의 변란이 끊이지 않자, 조선 조정에선 가덕도에 진을 설치하는 논의가 일어났다. 가덕도는 일본 쓰시마에서 북쪽으로 60여㎞ 거리에 불과하고 우리나라 남해안과 동해안을 잇는 바닷길에 자리잡고 있어, 왜인들이 통일신라시대부터 노략질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곳이기도하다. 1518년 1월 경상도의 육군사령관 격인 경상 병마절도사 조윤손은 왜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가덕도에 진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가덕도에 진을 설치하면 왜인들이 자주 다니는 경상도 바닷길의 요충을 점거하는 것입니다. 진에 주둔하는 병력이 많지 않더라도 왜인들이 감히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덕도 진 설치 논의는 수십년동안 계속됐다. 1538년 8월 우의정 김극성은 가덕도 진 설치를 반대했다. “가덕도는 바다 가운데 있어 다른 군에서 급히 도와줄 수 없습니다. 진이 설치되면 외로운 군대가 될 것입니다. 진을 설치한다면 두 개의 진이 필요합니다. 병사도 1500명 이상 주둔해야 합니다. 보급품을 대려는 상단의 폐해도 발생할 것입니다.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의 가덕도 복병 설치 건의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단병(칼 등 백병전 무기)에 능한 왜인들이 쳐들어온다면 우리 군은 당해낼 수 없습니다. 뭍이라면 말을 달리며 활을 쏴 물리칠 수 있겠지만, 섬에서 어디로 피할 수 있겠습니까.” 가덕도 진 설치는 사량진왜변으로 급물살을 탔다. 사량진왜변은 1544년 4월 왜인들이 20여척의 배를 이끌고 사량진(경남 통영시)에 침입해 조선 백성들과 말을 약탈해간 사건이다. 조선 조정은 1544년 5월 경상우도의 바닷가를 방어하기 위해 가덕도에 가덕진성과 천성진성을 설치했다. 이후 왜인들의 침략은 줄어들었다. 1592년 4월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전쟁 초기에 경상도 바닷길의 전략적 요충지인 가덕도를 공격·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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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왜성 주곽 부분의 성벽. 부산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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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절엔 해상무역 요충지
임란때 왜군들 왜성 쌓고 피신처로
전쟁 끝내기 직전까지 조선과 대치 ■ 경상도 바닷길의 요충지, 가덕도 가덕도는 면적 20.78㎢에 둘레 약 36㎞로 부산에서 가장 큰 섬이다. 동쪽으로는 낙동강과 부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경남 거제가 있다. 가덕도는 조선시대 웅천군에 속해있다가 1908년 창원군, 1910년 마산부, 1980년 의창군, 1989년 부산 강서구로 편입됐다. 가덕도는 부산~남해안을 잇는 바닷길 통로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통일신라는 가덕도를 당나라와 무역을 하고 돌아오던 주요 귀항지로 삼았다. 조선시대 말 흥선대원군은 1866년 해군기지가 있었던 가덕도에 쇄국정책의 상징물로 척화비(부산시 기념물 제35호)를 세웠다. 척화비는 현재 부산 강서구 천가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다. 일제강점기 직전인 1904년 일본 해군도 가덕도 외양포에 침입해 군사시설을 만들어 1945년 8월 일본 패망 때까지 운영했다. 통일신라~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남해안을 침략한 왜인들도 가덕도에서 태세를 정비한 뒤 노략질에 나섰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가덕도는 경상우도의 왜구 통로의 요충이다. 왜인들은 반드시 이곳을 통해 남해안과 전라도로 향한다”고 기록돼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왜군과 명나라가 강화교섭을 하던 1595년 조선 조정은 왜군이 물러간 뒤 재침을 막기 위해 가덕도에 군사를 증강·배치하려고 했다. 1595년 7월14일 영의정 류성룡이 선조한테 말했다. “경상우도의 군사들을 가덕진성과 천성진성에 두고, 부산 좌수사도 군대를 거느리고 그곳에 가서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뱃길의 수군도 배를 나란히 해 오르내리게 하면 (왜군이) 넘어 들어올 리가 없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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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왜성 주곽 터의 모습. 현재 주곽 터에는 소나무 분재들이 심어져 있다. 부산/김영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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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왜성 주곽에서 북서쪽으로 바라본 전경. 부산신항만이 내려다보인다. 현재는 해안이 매립돼 다리를 통해 육지와 연결돼 있어 부산~남해안의 바닷길은 막힌 상태이다. 부산/김영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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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왜성 주곽에서 북동쪽으로 바라본 전경. 부산 강서구 명지동과 앞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부산/김영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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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왜성 주곽 터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전경. 눌차·성북·동선동과 맞닿아 있는 얕은 수심의 만이 보인다. 이 만은 왜군이 조선 수군에 쫓길 때 긴급피난처 구실을 했던 것으로 관련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부산/김영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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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1~3m 성벽 겹겹이 두른 구조
왜성 터에 방어시설 수직해자 발굴
취재팀 발견한 새 성벽 정밀 조사를 ■ <한겨레>, 새로운 성벽을 발견하다 1961년 부산대 한일문화연구소가 발간한 <경남의 왜성지>에는 부산 강서구 가덕도 북쪽 끝 해발 155.7m 갈마봉 꼭대기를 중심으로 북쪽 사면을 타원형 모양으로 둘러싼 길이 350여m 규모의 성이 가덕왜성의 본성이라고 적혀 있다. 가덕도 북동쪽의 눌차도에 있는 성은 가덕왜성의 지성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고고학계는 추가 조사를 통해 눌차도의 왜성을 본성으로, 갈마봉 꼭대기에 있는 성을 지성으로 바꿔서 분류하고 있다. 또한 학계는 갈마봉 꼭대기에 있는 지성의 경우 왜군이 임진왜란 때 처음 쌓은 성이 아니라 고려시대 때부터 있었던 우리 성을 임진왜란 때 왜군이 점령해 수리해서 자신들의 성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갈마봉 꼭대기에 있는 성의 축성 방식이 고려 의종 때 쌓은 것으로 알려진 경남 거제도 둔덕기성과 비슷하고, 고려 충렬왕 5년(1279년) 가덕도에 군사를 파견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겨레>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시리즈 취재팀은 갈마봉 꼭대기의 성을 현장취재하는 과정에서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성벽을 발견했다. 이 성벽 유적은 지금까지 학계가 보고한 어떤 자료에도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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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도 북쪽 끝 갈마봉에서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길이 750여m의 성벽 유적이 취재팀에 의해 발견됐다. 관련 학계는 왜군이 이 성을 수리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진은 발견된 성벽 유적의 일부. 부산/김영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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