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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성2공원에서 바라본 울산왜성과 주변 전경. 왼쪽으로 태화강과 동천 합류지점은 물론 멀리 울산만까지 보인다. 울산왜성은 왜란 당시 섬처럼 보이는 산에 있다고 해서 ‘도산성’(島山城)으로 불렸고, 조선 후기에는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증성’(甑城)으로도 불렸다. 울산발전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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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⑬ 울산왜성
2013년 12월 울산시가 울산박물관에서 전시중이던 그림 한점을 사겠다고 예산 25억원을 편성했으나, 시의회의 예산안 삭감으로 무산된 일이 있다. ‘도산전투도’라고 불리는 이 그림은 임진왜란 막바지 정유재란 때 울산왜성(도산성)에서 벌어진 조·명 연합군과 왜군의 전투장면을 일본 관점에서 그린 병풍 그림이다. 가로 3.75m, 세로 1.73m 크기 6폭짜리 병풍 3개에 그려진 그림의 첫 장면은 울산왜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공격하는 조·명군과 성 안에 갇힌 채 식량과 물이 바닥나 말을 잡고 오줌을 받아마시며 악착스레 버티는 왜군의 모습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이어 성 밖에서 태화강을 끼고 왜군 구원병력과 조·명군이 대치하는 장면, 포위를 풀고 물러나는 조·명군 뒤를 왜군 구원병력이 쫓으며 공격하는 장면이 잇따라 펼쳐진다. 이 그림 원본은 정유재란 때 왜군 제4군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울산왜성 전투 때 구원병력을 이끌었던 왜장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뒤에 사가(佐賀) 번주가 돼 구술한 것을 바탕으로 그의 가신이자 종군 화가인 오키(大木)가 그렸는데 1847년 사가의 난 때 소실됐다. 울산시가 사려던 그림은 에도시대(1603~1867) 때 전해지던 모사본 3종 가운데 하나를 1886년 다시 모사한 것으로, 일본 유물 수집가 사카모토 고로(板本五郞)가 소장하고 있었다. 울산시는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울산왜성 전투 상황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희귀 유물”이라며 구입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일본인이 그들의 관점에서 그린 임진왜란 전투 그림 모사본을 거액의 시민혈세를 들여 구입할 가치가 있냐”는 반대 여론에 끝내 밀렸다. 그림을 사려기에 앞서 그림의 실제 현장인 울산왜성의 보존과 관리,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한 시민 홍보에는 얼마나 관심이 있었는지부터 되새겨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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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성산 충의사 안 전시관에 있는 울산왜성 전투 장면을 형상화 한 모형. 충의사는 2000년 7월 울산왜성 전투 당시 조·명군 지휘부가 있던 학성산에 세운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왜군들과 맞서 싸우다 희생된 울산지역 의병 239명과 그밖의 다수 무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이곳엔 임진왜란 관련 전시관도 있다.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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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설계로 전투직전 40일간 공사
실록 “내성 험고하고 격파 어려워…”
공사 쫓겨 천수각·우물 못지어 눈길 하지만 조·명군은 끝내 울산왜성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렇게 장기전으로 시간을 끄는 사이 부산, 김해, 양산 등에서 왜군 구원병력들이 속속 울산으로 출동해 그 수가 6만여명에 이르자 역포위를 우려한 조·명군은 울산왜성의 포위를 풀고 경주로 물러나고 말았다. 실록에 기록된 당시 전투상황을 보면 조·명군이 목책과 흙으로 쌓은 왜성 외곽부는 그대로 치고 들어갔으나 돌로 쌓은 내성은 “험고하고 격파하기 어려워 포위한 상태로 주둔하면서 그들이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조선군들이 마른풀과 섶을 지고 성 밑까지 진격해 적의 진영을 불태우는 화공까지 몇차례 시도했으나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적의 탄환 때문에 사상자만 수없이 낸 채 실패로 끝났다. <연려실기술>과 <선조실록>엔 이 전투로 인한 명군과 조선군 전사자가 각각 1400여명과 1000여명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일본의 <조선물어>에는 명군 전사자가 1만5000명을 넘는 것으로 나와 있다. 기록에 따라 차이가 크나, 조·명군 전사자가 몇천명에서 1만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명군은 주로 후퇴 과정에, 조선군은 주로 울산·경주 병사들이 화공에 동원됐다가 많은 사상자를 낸 것으로 기록됐다. 성 안의 왜군도 구원병력이 도착했을 때 십중팔구가 빈사상태로 확인됐다고 한다. 명군이 후퇴하면서 부린 행패 때문에 인근 백성들 피해 또한 컸다. 실록은 당시 명군 장수를 수행했던 접반사의 보고를 통해 “회군하는 군사는 다시 대오를 편성하지 못하고 그 행동을 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어 촌락에 들어가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하고 부녀자들을 강범하며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해 적이 지나간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기록했다. 이에 어떤 마을의 노파는 울부짖으며 “굶주림을 참고 쌀을 찧어서 군량을 댄 것은 왜적을 평정하는 날을 기대해서인데 이제 도리어 이와 같이 되었으니, 다시 살아갈 길을 바랄 수가 있겠는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후 조·명 연합군은 1598년 9월 사천·순천 왜성과 함께 울산왜성에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9월21일 명군 제독 마귀는 2만4000여 군사를 이끌고, 별장 김응서의 5500여 조선군과 함께 먼저 동래를 공격해 부산쪽 왜군과의 연결을 차단한 뒤, 가토의 1만5000여 왜군이 지키는 울산왜성 공성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마귀는 25일 경주로 말머리를 돌렸다가 10월6일 사천에서 명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영천으로 다시 후퇴했다. 11월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에 따른 본국의 귀환명령을 받고 가토와 휘하의 왜군들이 성에 불을 지르고 물러난 뒤에야 마귀는 이 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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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왜성 본곽의 모서리쪽 성벽.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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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왜성 본곽 동쪽 성벽.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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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일 3국 12만 대군 12일간 격돌
전사자만 1만명 내고 끝내 함락 못해
명군 후퇴중 인근 백성에 수탈 극심 울산왜성은 독립된 구릉에 쌓은 성이기 때문에 대규모 병력으로 성을 포위해 고립시키기는 쉬운 반면, 어느 방향에서도 공격로를 찾기는 힘든 구조를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명군은 전투 초반, 쉽사리 성을 에워싸고 돌격전을 감행했지만 끝내 성을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당시 명군 경리 양호를 수행했던 접반사 이덕형과 도원수 권율은 보고를 통해 “석축이 깎아지른 듯하고 토굴이 마치 벌집과 같은데 중국군이 위로 쳐다보며 공격해야하기 때문에 형세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이 성은 이처럼 외부 공격으로부터는 철통같은 요새였지만 성 안에 우물이 없다는 치명적 약점을 갖고 있었다. 조·명 연합군과의 전투 때 성 안에 고립됐던 왜군들이 갈증을 못견디고 어둠을 틈타 성 밖으로 나가 물을 찾다가 매복해 있던 별장 김응서의 조선군에게 붙잡히거나 목숨을 잃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이 때문에 가토는 본국에 돌아가 자신의 영지 구마모토에 성을 쌓을 때 포위된 상태에서도 군량과 식수 확보에 문제가 없도록 성 안에 우물 120여개를 파고 실내 다다미를 식용 가능한 고구마 줄기로 만드는 등 각별히 신경을 썼다고 한다. 이 성은 왜란 이후 한동안 조선 수군의 주둔지로 이용됐고 1624년부터 30년간 전함을 건조하는 전선창을 두기도 했다. ‘울산학성’이란 이름으로 일제강점기 때엔 조선 고적 제22호(1935년 5월)로, 해방 뒤엔 국가 사적 제9호(1963년 1월)로 지정됐다가, 1997년 10월 일제지정 문화재 재평가에 따라 ‘울산왜성’으로 이름이 바뀌고 울산시문화재자료 제7호로 격하됐다. 한삼건 울산대 디자인·건축융합대학장은 “원래 학성은 나말·여초 때 우리 옛성인 계변성 또는 신학성을 일컫는 것으로, 울산왜성 북쪽 맞은편 학성산에 있었다. 이곳엔 고려 말·조선 초의 옛 읍성도 있었고, 울산왜성 전투 때 조·명 연합군 지휘부가 주둔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조·명군 지휘부가 있던 학성산엔 2000년 7월부터 임진왜란 때 왜군들과 맞서 싸우다 희생된 울산지역 의병 239명과 그밖의 다수 무명의 위패를 봉안한 충의사가 세워졌다. 울산왜성은 왜란 당시 섬처럼 보이는 산에 있다고 해서 ‘도산성’(島山城)으로 불렸고, 조선 후기에는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증성’(甑城)으로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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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왜성 본곽 동쪽 주출입구 주변의 2단 성벽. 본곽 주출입구 주변으로 성벽의 석축이 가장 잘 남아 있다.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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