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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5.17 20:18 수정 : 2016.05.18 09:22

11일 경기도 부천시 원미노인복지관에서 함복녀(왼쪽)씨가 고문욱씨의 도움을 받으며 한글 받아쓰기를 배우고 있다.

⑨ 원미노인복지관 ‘글마루배움터’

나이 칠순이 넘어 난생처음으로 연필을 잡았다. ‘가갸거겨…’부터 꼭꼭 눌러쓰며 느리지만 조금씩 조금씩 한글을 배워나갔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난 함복녀(77)씨는 올해 3월에 경기도 부천시 원미노인복지관 ‘글마루배움터’를 찾았다. 어르신이 어르신에게 기초한글을 일대일 맞춤형으로 가르치는 프로그램이다. 해마다 3월부터 11월까지 매주 수·금요일 세 시간씩 진행된다.

지난 11일 원미노인복지관에서 함씨는 한글 선생 고문욱(74)씨의 도움을 받으며 받아쓰기를 하고 있었다. 함씨는 ‘봄이 가고 여름이’, ‘겨울 가고 새봄이’라는 글귀를 열한 번씩 따라 쓰고 있었다.

“이거는 가을이래요?”라고 함씨가 물었다.

“이 글자를 표에서 찾아보세요. 거 다음에 뭐죠? 그렇죠. 겨. 그러면 무슨 글자일까요?”

“아 겨울 가고 새봄이.”

쉬는 시간이 되자 가르치는 어르신과 배우는 어르신이 간식으로 준비해 온 콩, 떡, 포도 등을 나눠 먹었다. “어려워 어려워”를 연발하던 함씨는 먹을 것을 권하며 칠십 평생의 한을 털어놨다. “3남1녀의 막내로 태어났는데 집이 가난하여 오빠와 언니가 모두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농사일하느라 배울 겨를이 없었다. 부천 온 지 5년쯤 되었는데 동네 친구가 복지관에 가면 한글을 가르쳐준다고 하길래 큰맘 먹고 왔다. 그동안 어디 멀리 갈 때 차를 탈라치면 행선지를 읽지 못해 답답했는데 이제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조금 더 배우면 영감님에게 편지도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같이 한글 교육을 받고 있는 김홍자(74)씨는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복지관에 와서 국어 공부를 하면서’라는 제목으로 편지를 썼다. 그의 편지에는 그 연세의 어르신들의 ‘못 배운 응어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들 그랬다, 그때 그 시절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은

학교는 꿈도 꾸지 못했다
소 꼴 베랴 나무하랴 동생 돌보랴

친구들이 학교 갔다 올 시간에는
혹 눈 마주칠까 나무 뒤에 숨었다

까막눈으로 시집가서는
남편에게 배울까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층층시하 어른들과 시누이

팍팍한 살림에 아이들 키우고 보니
어느새 세월이 흰머리만 남겼다

안 배운 게 아니라 못 배웠다
배워도 까먹고 배워도 까먹지만
이젠 세상을 내 눈으로 읽는다

“가르쳐주지도 않고 무시하고…”

경북 상주의 산골마을에서 1남5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팍팍했던 부모님을 도와 소 꼴도 베고 나무하고 동생들을 돌보며 자랐다. 학교에 간다는 건 꿈조차 꿀 수 없었다. 깡동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책보를 메고 학교에 가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혹시나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친구들과 눈이 마주칠까 나무 뒤에 숨어 가슴이 미어졌다. (중략) 까막눈으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시집을 가게 됐다. 신혼의 꿈과 함께 남편에게 한글을 배울 수 있을 거라는 설렘도 있었다. 하지만 층층시하 시가 어른들의 시중과 시누이들의 눈치에 겨를이 없었다.

아이들 시집·장가보내고 한숨 돌리고 나니 배우지 못한 아쉬움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김홍자씨와 박승녀씨가 스승의 날을 맞아 직접 쓴 감사편지.
“기역, 니은, 디귿…,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칠십이 다 되도록 부모님 원망하지 않았지만 공부를 시작하면서 부모님 원망도 많이 하고 세종대왕님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왜 이렇게 한글을 어렵게 만드셨냐고. 지금도 내 마음에 흡족하지 않지만 그래도 한두 자 배워서 전국문해학습자 편지쓰기 대회에서 상장도 받고 또 검정고시 합격해서 중학교 가는 자격증도 받았습니다. 이만하면 어린 시절 배우지 못한 한을 절반은 푼 것 같습니다.” 편지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국어 중급 과정에서 초등학교 3~4학년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나순례(81)씨는 “큰 목적은 없지만 글을 모르니 영감님한테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하하, 가르쳐주지도 않고 말이지…. 배우는 게 좋아. 버스도 알아보지만 이젠 간판도 알아봐. 덜 무시당하게 되었어. 친목회 자리에서 모이면 이제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고 먹으러 가게 되었는데 너무 좋다”고 말했다.

나씨를 담당하고 있는 이귀병(71)씨는 평소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2010년부터 이곳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 “집에 가면 일기를 쓰시라. 받침 틀린다고 뭐라 하지 않으니 편하게 하시라”라면서 나씨를 격려했다.

여성 노인 42%가 무학력

역시 이곳에서 한글을 배우는 박승녀(76)씨는 선생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습니다. 학교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항상 우리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일만 시켜서 글을 배우지 못한 이 마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중략) 복지관에서 한글을 가르쳐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기는 했으나 이름을 쓰라고 할까 봐 그냥 돌아왔다고 했더니 남편이 등록을 해주어서 친구들과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중략) 하지만 배우고 또 배워도 머릿속에 들어가질 않고 다음날이 되면 생각이 잘 나지 않습니다. (중략) 몸과 마음이 예전 같지 않아 너무 힘이 들어 그만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수없이 했지만 참고 또 참았습니다. 이제는 잘은 못하지만 동사무소에 가서 등본도 떼어보고 은행에 가서 돈도 찾아봅니다. 요즈음 나는 읽고 쓰는 재미에 푹 빠져 정말 행복합니다.”

노인복지관에서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은 다양하다. 그동안 만났던 복지관의 노인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나이를 먹었음에도 뭔가를 새롭게 배운다는 것에 대해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데 한글교육의 경우 유난히 많은 노인들이 본인을 드러내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본인들의 의지와 무관한 것인데도 한국 사회에서 교육 콤플렉스는 여전히 고질적이다. 보건복지부 산하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만든 ‘2014년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65살 이상 노인 인구 100명당 20.9명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고 9.6명이 글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성 노인의 42.3%가 학력이 없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 젊은 사람들이 노인들로부터 ‘배우는 정신’을 배워야겠다.

글·사진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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