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닉>의 주인공은 중증 에이즈 환자, 말기암 환자들을 주로 돌보는 전문 간병인이다. 영화는 지극히 세밀하고도 회화적인 장면 구성을 통해 침묵에 무게를 얹는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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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크로닉’
솔직히 말하자. <크로닉>은 페로몬 하늘 가득 흩날리는 이 화창한 계절에 관람을 함부로 권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주인공은 중증 환자들을 주로 돌보는 전문 간병인이다. 그가 돌보는 환자들은 중증 에이즈 환자, 뇌졸중으로 쓰러진 괴팍한 노건축가, 말기암 환자 등 죽음을 대면하는 정도가 아니라 죽음의 콧김을 들이켜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더구나 감독인 미셸 프랑코가 전작인 <애프터 루시아>에서 취했던 고정된 카메라와 롱테이크 위주의 화면 구성, 그리고 배경음악을 철저히 배제하는 원칙 등은 이 영화 <크로닉>에 와서 더더욱 엄격해졌다. 왕년(그러니까 1990년대 말)에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도그마 선언’이라는 타이틀 아래 ‘영화의 예술적 순수함을 회복하자’라는 취지의 운동(또는 캠페인)을 벌이면서 이런 기법들을 순수영화의 절대 원칙으로 천명한 바 있는데, 최근 다르덴 형제나 미하엘 하네케 등의 감독에게 영향을 받은 젊은 감독들이 정작 그 자신은 폐기한 지 오래인 이런 원칙들을 일종의 유행처럼 공유하고 있는 걸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자못 궁금한 가운데, 여튼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불편한 소재 및 주제들을 치장이나 설교 없이 천천히 드러내주는 원칙 덕분에 이 화사하지 못한 소재들은 더욱 무뚝뚝하게 다루어진다.
그런데 롱테이크와 고정카메라와 배경음악 배제라는 원칙은 무조건 ‘옳은’ 걸까? 그런 원칙들이 영화를 자동적으로 훌륭하게 만들어줄까? 그리고 그런 기법들로 관객의 ‘참여와 해석’을 요구하고 독려한다는 의도는 그대로 관객들에게 작동해줄까? 당연한 얘기지만 어떤 기법도 그 자체로 ‘옳은’ 것은 없다. 기법상의 원칙들은 그것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조응할 때만 오로지 훌륭한 것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그다지 새롭지도 충격적이지도 않은 미셸 프랑코의 원칙들은 얼마든지 공허한 허세에 머물 수도 있었다. 그것을 막아준 것이 이 영화의 시나리오다.
<크로닉>의 시나리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거기에 적힌 대사보다 적히지 않은 대사다. 그 침묵과 여백 동안 영화는 지극히 세밀하고도 회화적인 장면 구성을 통해 침묵에 무게를 얹는다. 예를 들어 에이즈 환자인 ‘사라’의 집 현관에서, 휠체어에 앉은 ‘사라’에게 주인공 ‘데이빗’이 식사를 떠먹여주는 장면을 보자. 이 장면은 근경(정원의 나무와 관엽식물들), 중경(현관으로 통하는 아치가 있는 하얀 벽), 원경(‘사라’와 ‘데이빗’이 앉은 현관)이라는 지극히 고전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데이빗’은 중세 성화에서 흔히 사용되던 프레임인 아치형 프레임 속에서 마치 성모 앞에 무릎을 꿇은 예수 같은 자세로 음식을 떠주고 있다. 이들의 머리 위로 비스듬히 비쳐드는 부드러운 햇빛은 이들의 관계가 세속적인 환자와 간병인의 관계를 넘어서 있음을 한껏 강조하고 있다. 만일 이 장면이 없었다면, ‘사라’가 죽은 뒤 ‘데이빗’이 다른 사람들에게 태연히 자신을 에이즈로 아내를 잃은 남자로 소개하는 장면은, 미묘한 이중성 없이 그저 섬뜩한 장면으로 그쳤을 것이다.
한 가지만 더 짚자면, <크로닉>은 뭔가를 가리기 위한 수단이 아닌, 뭔가를 강조하는 수단으로서 어둠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렘브란트적인 빛 사용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예컨대 ‘데이빗’이 성추행의 누명을 쓰고 해고된 뒤 어둠 속에 말없이 앉아 있는 장면을 보자. ‘데이빗’의 앞에는 흰색으로 환하게 빛나는 문이 빛이 가득한 밖을 향해 열려 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하게 떠오른 ‘데이빗’의 실루엣은 미동도 않고, 팀 로스의 웅크린 몸은 그 자체로 많은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윽고 ‘데이빗’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그가 향해 사라지는 곳은 문밖이 아닌 어둠 속 더 깊은 어딘가이다. 이 장면은 영화의 제목 ‘크로닉’(만성적인)을 가장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우리 실제 삶에서 하나의 배경, 또는 기능에 지나지 않는 간병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데이빗’ 역시 엄연히 한 명의 사람이고, 내면이며, 그 안에는 수많은 어둠의 막들이 만성적으로(!) 쌓여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이렇게 영화가 말하지 않은 것들은 저마다의 무게를 지닌 채 쌓여간다. 차곡차곡 쌓여간 침묵의 무게는 몇 마디 되지 않는 무덤덤하고 무뚝뚝한 대사들 위에 고스란히 실린다. 그렇게 이 영화의 대사들은 힘을 얻게 된다.
종종 에드워드 호퍼의 터치까지도 느껴지는 이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관람 전에 호흡 자체를 조정할 필요가 있겠다. <크로닉>은 ‘영화를 본다’는 호흡보다는 ‘미술관에 왔다’는 호흡이 훨씬 어울리는 영화다. 또는 영화의 모습을 한 초상화다. <크로닉>은 ‘사라’, ‘존’, ‘마르타’ 그리고 ‘데이빗’ 그 자신이라는 네 명의 환자들을 주제로 한 네 개의 전시실이다. 필자는 각 전시실에 성자, 박해, 악마, 심판이라는 이름을 붙여봤지만, 그 이름은 관람객들에 따라 제각기 달라질 것이다. 그것이 감독 미셸 프랑코가 원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거의 성공했다. 영화가 열어놓은 모든 가능성들의 문을 단번에 닫아버리는 그 ‘충격적’ 엔딩 전까지는.
한동원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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