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6.17 19:05
수정 : 2016.06.17 19:08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정글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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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는 배우, 감독, 작가 등 개개인의 의지와 개성이 아닌, 전적으로 산업적 이해와 편의에 의해 영화를 만들 수 있음을 영화 <정글북>을 통해 만천하에 증명해 보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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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생사에서 무엇 하나 아이러니 아닌 것 없겠으나 <정글북>이 보여주는 아이러니는 그중에서도 기념비적으로 노골적이다. 특히 인간의 손때 전혀 묻지 않은 자연을 만들기 위해 사용된 인간의 손때의 정점에 있는 최첨단 컴퓨터그래픽(이하 시지) 기술은 거의 튀김 아이스크림 수준의 극과 극의 공존이다.
이는 언뜻 ‘애니메이션의 실사영화화’의 일환으로 보인다만, 사실은 ‘실사영화의 애니메이션화’의 귀결이다. <정글북>은 지난 1982년 디즈니가 업계 최초로 시지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실사영화 <트론>을 통해 드러냈던 ‘배우와 로케이션이 필요 없는 영화’라는 야심이 34년 만에 드디어 완성단계에 도달했음을 입증하고 있는 영화라는 얘기다.
아, 물론 <정글북>에 배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 거의 유일한 인간 배우인 ‘모글리’ 역 닐 세티는, 가끔씩 좀 너무 연기된 연기를 보이는 약점을 노출하긴 하나, 그래도 첫 장편영화 주연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매끈한 연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핵심은 역시나 <정글북>의 배우들의 캐스팅은 (그 적절함과 연기의 질과는 별도로) 필요한 경우 언제든 대체가 가능하다는 점에 있다. 사실 흥행력의 극대화라는 목표를 버린다면 모든 동물 캐릭터의 목소리 연기는 딱히 유명 배우가 맡지 않아도 큰 지장이 없다. 주연아동 닐 세티 역시 2000 대 1이라는 오디션 경쟁률이 단적으로 말해주듯 대체 불가능의 유일무이한 배우는 아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 영화의 감독 존 패브로가 연출했던(그리고 이제는 디즈니의 자회사가 된 마블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아이언맨> 1편의 ‘로디’ 역 테런스 하워드가, 2편으로 넘어가면서 갑자기 돈 치들로 교체되었던 일, 그리고 그에 대해 주최 쪽으로부터 어떤 설명을 듣지 못했던 일(심지어는 교체당한 당사자인 테런스 하워드마저도 아무런 해명도 듣지 못했다)을 기억한다. 뭐 딱히 그 바닥에 있을 것 같지도 않는 강호의 의리 따위를 논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이제 디즈니는 배우, 감독, 작가 등 개인의 의지와 개성이 아닌, 전적으로 산업적 이해와 편의와 의지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여건을, 시스템으로만이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완전히 구비했음을, 이 순진무구하고도 천연자연적인 영화 <정글북>이 만천하에 증명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대체하지 못하고(또는 않고) 있는 것 하나가 있다. 캐릭터다. ‘모글리’는 애니메이션 <정글북> 공개 이후 4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기원과 용도와 내구성에 대한 신비가 전혀 풀리지 않고 있는 적색 팬티를 착용하고 있다. 천하태평 곰 ‘발루’는 여전히 영화의 중추이자 핵심을 이루며 ‘모글리’를 배 위에 태운 채 그야말로 결정적 스코어인 ‘베어 네세서티즈’(Bare Necessities)를 함께 부른다(언제 봐도/들어도 멋지고 훈훈한 장면/노래다). 원숭이 왕 ‘루이’는 크기가 몇 배 커졌을 뿐 여전히 정글을 지배하기 위해 불을 만들 수 있는 인간 아이를 원하고, 흑표범 ‘바기라’는 그런 인간 아이의 뒤를 돌보며 그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고 호랑이 ‘쉬어칸’이 있다. 그는 50년에 가까운 세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포악한 독재자로서 영화의 악의 축을 담당하고 있다. (필시 당시 공산권 권력수뇌들을 겨냥하고 있었을) ‘완력을 앞세운 포악한 독재자’와 그에 대한 저항이라는 냉전시대에 지극히 어울리는 그의 역할은, 자본주의의 완벽한 승리가 확정 판결된 지금 이 시대에서도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최첨단을 넘어 극첨단이라 할 기술에도 불구하고 <정글북>이 어딘지 모르게 낡아 보이는 이유는 이것이다. 영화는 내내 원시림 우거진 정글 속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탐욕에 의한 정글(나아가 자연)의 절멸이라는, 현재의 정글이(그리고 자연이, 하여 우리가) 처해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정글의 목소리는 오로지 정글에 침범한 인간(‘모글리’의 생부)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으로 불타오르는 ‘쉬어칸’의 맹목적인(그리하여 설득력 상당히 떨어지는) 분노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다. 아주 희미하게.
그리고 그 희미한 정글의 목소리는 ‘도구의 동물’로서의 개성을 금기시한 ‘정글의 법칙’을 거스르며 그것을 각성하고, 사용하고, (
*주의! 여기서부터 스포일러 포함) 마침내 불도저 굴착기와 함께 정글에 가장 치명적인 인간 도구인 불을 정글로 가지고 와 ‘쉬어칸’에 대항하는 ‘모글리’의 사뭇 영웅적인 행동에 의해 완전히 파묻힌다. 불태워진다. 정글 그 자체와 함께.
물론 이 영화는 디즈니의 영화, 그중에서도 ‘온가족 영화’인 만큼 이러한 파국에 대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모글리’는 장엄하지만 편의적인, 그리고 지극히 인공적인 결말을 통해 불멸의 디즈니표 테마인 ‘나만의 정체성 찾기’를 다시 한번 달성해낸다. 그리고 동물들과 인간 아이는 입 모아 ‘정글의 규칙’을 합창한다만 영화의 ‘최첨단’은 이미 이 시대착오적 결말과 정면충돌, 자연발화하여 잿빛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정글북>은 원래부터 그런 이야기라고? 아서. 우리는 지금 감독도, 작가도 아닌, 캐릭터 판권을 가진 회사의 최고경영자(CEO)와 ‘위원회’가 배우/작가/감독은 물론, 시간과 공간까지 지배하며 이야기와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변형·왜곡·재조합시키는 시대, 그리고 그 시이오와 ‘위원회’에 열광하는 팬들을 거느린 ‘과두창작’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배우도 로케이션도 필요 없게 만드는 최첨단 기술은 이 ‘과두창작’에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충성스러운 친위대다.
한동원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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