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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서>는 한 인간에게 깃든 압도적 재능이 현실이라는 가혹함을 만났을 때 벌어지는 일에 대한 흥미로운 관찰 및 고찰이다. 엣나인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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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댄서> <지니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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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서>는 한 인간에게 깃든 압도적 재능이 현실이라는 가혹함을 만났을 때 벌어지는 일에 대한 흥미로운 관찰 및 고찰이다. 엣나인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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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라는 단어가 그 어느 때보다도 대량소비되고 있으나, 진성 천재 및 그 천재가 마음껏 뛰어놀 사회적 공터는 점점 희귀해지는 지금, 우연찮게 천재에 대한, 그것도 실존하는/했던 천재에 대한 두 편의 영화가 동시에 개봉하는 관계로 이번주에는 <댄서>, <지니어스> 두 편에 대한 얘기를 한꺼번에.
먼저 <댄서>. <댄서>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발레리노 세르게이 폴루닌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그런데 가만. 이 짧은 문장에서 우리의 관람지심을 순간 저감시키는 핵심 단어가 두 개나 등장하고 있는바 ①‘발레’와 ②‘다큐’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경계지심을 돋우기에 앞서 고려할 것은 <댄서>가 이 둘을 상쇄할 법한 키워드 또한 두 점 함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③‘천재’와 ④‘가족’이라는 두 키워드 말이다.
두 키워드 ‘천재’ 와 ‘가족’
아무래도 이들 중 가장 강력한 키워드는 ③일 텐데, 무용 특히 발레에 관심 두셨던 분들은 이미 잘 알고 계실 이 영화의 주인공 세르게이 폴루닌은, 19살에 영국 왕립발레학교의 수석무용수가 되며 일대 파란을 일으킨… 이라는 표현조차 사실 너무 구차하고도 세속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재능과 실력의 소유자다. 딱히 발레나 무용의 전문가나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그저 10초 정도 그의 춤을 보면 천재라는 말 외에는 달리 그 놀라운 현상을 표현할 길이 없을 것이라 사료되는데, <댄서>는 그 세르게이 폴루닌의 어린 시절부터 27세가 된 현재까지를 다루고 있다.
맞다. 이 영화가 다루는 사람은 아직 채 서른 살도 되지 않은 젊은이인 것이다. 더구나 갑작스런 요절 등의 드라마틱한 사건의 주인공도 아니고,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의 민간인 무차별 감시를 폭로하여 전 세계를 뒤흔든 인물도 아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 영화는 천재의 놀라운 재능과 능력을 찬미하는 영상 스크랩북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나올 법한데, 이때 등장하는 답이 폴루닌의 가족이라는 또 다른 축이다.
폴루닌은 우크라이나의 부유하지 못한 가정에서 성장하면서 발레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 그를 본 어머니의 결심으로, 아버지는 물론 친가 외가 두 할머니까지도 어린 폴루닌의 뒷바라지 또는 그를 위한 돈벌이에 매달리기로 결정한다. 여섯 살짜리 어린아이 한 명의 미래에 가족 삶 전부가 투입된 것이다. 그리하여 엄마는 폴루닌의 그림자가 되고, 아버지와 할머니는 돈벌이를 위해 해외로 흩어지는 가족의 고난사가 시작된다. 자, 그렇다면 이 영화는 다큐판 <빌리 엘리어트>인 것인가?
<빌리 엘리어트>가 그러했듯 이 영화도 두 가지 시점을 취한다. 하나는 ①그 고난을 감내한 어른들의 삶이 어떻게 되었는가. 그리고 또 하나는 ②그 어른들의 고난을 한 몸에 짊어진 어린아이의 삶은 어떻게 되었는가. 영화는 ①과 ②를 3 대 7가량의 비율로 안배하면서, 간결하고도 주도면밀하게 엮어나간다.
‘댄서’
19살에 왕립 발레학교 수석 된
천재 발레리노와 가족의 고난사
가혹한 현실을 만난 천재성이
저주일 수도 있음을 그린 다큐
‘지니어스’ 주드 로, 콜린 퍼스 주연
미국 문학사 두 거장의 에피소드
캐릭터 성격·능력 묘사 부족해
밋밋하고 느슨한 시대물 그쳐
일단, 그의 춤을 담은 영상이라면 이미 유튜브 등지에서 얼마든지 반복재생 또 재생해볼 수 있는 상황에서, 그의 어린 시절을 인공적 살균처리 과정 없이 생생하게 보여주는 홈비디오 영상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큰 특장점 중 하나일 것이다. 어린 시절을 인터뷰나 스틸사진 등으로 어렵사리 재구성하는 대신, 그것을 그대로 기록한 생생한 화면들이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폴루닌이 고화질 캠코더를 일반인들도 어렵지 않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시대인 1990년대에 성장한 덕분이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다. 이 대목에서 가족 중 한 인물이 중요하게 대두되는데, 그것은 바로 이 화면의 대부분을 촬영하고 또 그것을 모두 보관해 온 폴루닌의 엄마(갈리나 폴루니나)다. 언뜻 보기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댄서>는 사실상 폴루닌이라는 천재와 그의 천재적 재능을 손으로 만져지는 실체로 만들어내고, 그것을 넓은 세상으로 내보내려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그의 엄마 사이의 긴장과 갈등, 증오와 애정에 대한 영화다. 그리고 압도적인 재능이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는 축복임과 동시에 저주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는 섣불리 폴루닌의 엄마(와 가족들)가 내린 결정의 옳고 그름을 평가하지 않는다. 대신, 눌어붙지도 떨어져 나가지도 않는 적당한 거리를 둔 채 폴루닌과 그의 가족이 견뎌야 했던 남루한 현실을, 그 정반대의 세계에서 온 것 같은 춤과 나란히 놓으면서 긴장과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덕분에 <댄서>는 천재 춤꾼의 재능에 대한 습관적 찬미도, 자식 한 명에 모든 것을 건 부모들에 대한 손쉬운 비판도, 우리 시대의 감동적 성공 동화도 아닌, 한 인간에게 깃든 압도적 재능이 현실이라는 가혹함을 만났을 때 벌어지는 일에 대한 흥미로운 관찰 및 고찰이 되었다.
물론 이 영화가 영화적으로 새롭거나 탁월한 성취를 거두고 있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적어도 <빌리 엘리어트>만큼 신선한 만듦새의 영화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자신이 할 이야기와 그것을 풀어내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숙련자의 노련한 솜씨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끼우고 있는 액자의 견고함을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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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어스>는 많은 에피소드에도 불구하고 천재라는 존재에 대해 어떤 얘기를 하려는 것인지 끝내 알 수 없다. 라이크 콘텐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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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니어스>의 경우, <댄서>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 <댄서>에서의 천재는 그야말로 시각적인 예술에서의 천재다. 더구나 움직임을 핵심으로, 그것도 우리 모두의 지대하고도 영구적 관심사 중 하나인 인간의 몸과 움직임을 핵심으로 하는 시각예술에서의 천재 말이다. 하지만 <지니어스>의 ‘천재’는 문학(소설)이라는 전혀 시각적이지 않은 예술장르의 ‘천재’다. 게다가 이 영화에서 ‘천재’로 지목되고 있는 인물은, 창작자인 소설가뿐 아니라 그의 파트너인 편집자까지 두 명이다.
뭐, 원래 작가라는 직업군에서야 ‘천재’라는 수식어가 워낙 흔하고도(꼭 그렇지도 않은가) 자연스러운 것이다만,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직군인 편집자에게도 작가와 동등한 ‘천재’라는 타이틀과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일 것이다. 더구나 그 둘을 연기하는 배우가 주드 로(작가인 ‘토머스 울프’ 역)와 콜린 퍼스(편집자인 ‘맥스웰 퍼킨스’ 역)인 마당에야.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지니어스>는 그 특장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말할 것도 없이 실제 토머스 울프는 미국 문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임에 틀림없고, 맥스웰 퍼킨스도 미국 문학사상 가장 성공적인 편집자 중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임 또한 틀림없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무게가 자동적으로 영화의 캐릭터로 전이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여, 중요한 것은 실화와 상상의 배합으로 만들어진 ①구체적인 에피소드들의 흥미 및 설득력, 그리고 두 인물을 묶고 섞음으로써 기대되는 ②천재라는 존재에 대한 나름의 고찰의 깊이, 이 두 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 토머스 울프는 ‘갑작스런 성공에 들떠 약간은 제멋대로이고, 다소는 광기 비슷한 것까지 보이는 젊은 작가’의 전형, 맥스웰 퍼킨스는 그런 그를 ‘연륜과 인내로 지켜보고 보살피고 이끌어주는 사려 깊은 멘토’의 전형에 머문다. 일종의 우정출연처럼 등장하는 스콧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 또한 ‘사료에 충실한’ 버전을 넘어서지 않고 있고 말이다. 요컨대, 이 영화가 파고들 만한 가장 흥미로운 포인트인 작가와 편집자 간의 긴장/충돌은 거의 일과성 에피소드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
천재 없는 천재 영화
영화는 기회가 날 때마다 소설의 구절들을 적극 인용하며 자신의 인물들과, 그들의 시대와, 그리고 그들의 작품에 대한 존경 어린 애정과 연민을 바치고 있고, 그중 몇몇 대사와 장면들은 확실히 마음을 파고든다. 예컨대 울프와 퍼킨스가 빌딩 옥상에 올라가 나누는 이야기(그중 특히 퍼킨스가 ‘이야기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는 대사) 및 그 장면에서의 뉴욕의 전경(물론 컴퓨터그래픽의 산물이긴 하다만)은, 그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무시할 수 없는 울림을 갖는다. 또한 피츠제럴드가 울프에게 들려주는 ‘오랫동안 걸어야 하는 외롭고 괴로운 길’에 대한 대사는 그야말로 가슴이 미어진다. 그것을 이끌어 가는 것은, 소설이 모두의 무엇인가였던 시대에 대한 애수 어린 시선이다.
하지만 그 모든 에피소드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이 영화가 천재라는 존재에 대한 어떤 얘기를 하려는 것인지 끝내 알 수 없다. 아니, 사실 그 이전에, 이 영화에서는 천재라는 존재의 실체를 목격하기부터가 쉽지 않다. 인용된 소설의 구절들, 울프의 전형적인 ‘문학천재’풍 괴팍함, 퍼킨스의 온화하고 참을성 많은 인품과 능력에 대한 묘사로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그리하여 <지니어스>는 제목을 빼곤 어느 곳에서도 천재를 볼 수 없는, 밋밋하고도 느슨한 시대물이 되고 말았다.
하여 이 두 영화를 통해 얻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우리가 쉽게 잊곤 하는 교훈 하나: 천재라는 단어만으로는 결코 천재가 태어나지 않는다.
▶ 한동원 <적정관람료> 편집장.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의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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