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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덴 형제는 열 번째 장편 <언노운 걸>에서 탐정소설식 장르를 도입했다. 영화 속 주인공 제니는 병원 벨을 누른 뒤 숨진 흑인 소녀가 누군지 밝히는 일에 직접 나선다. 오드(AUD)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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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언노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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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덴 형제는 열 번째 장편 <언노운 걸>에서 탐정소설식 장르를 도입했다. 영화 속 주인공 제니는 병원 벨을 누른 뒤 숨진 흑인 소녀가 누군지 밝히는 일에 직접 나선다. 오드(AUD)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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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 봐.” 이 대사로 영화는 시작된다. 이것은 환자를 청진하는 의사 ‘제니’(아델 에넬)가 자신의 수련의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영화가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들어 봐. 다른 사람들의 소리를. 그들의 이야기를. 그런데 그 소리가 근무시간(진료 마감시간)을 한 시간 넘겨 울린 벨소리라면 어떨까. 그것도 별로 급한 용무는 아닌 듯, 별 뜻 없이 누른 듯, 단 한 번만 울리고 끝난 벨소리라면.
‘제니’는 그 벨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의사도 쉬어야지”가 그 이유였지만, 사실 그날은 그녀가 일하기로 정해진 큰 병원(링컨센터) 의사들과의 약속이 있었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 모임에 참석한 모두는 그녀를 환영하는 분위기다. 요컨대 그녀는 유능한 의사이고, 창창한 커리어 고속도로가 그녀 앞에 펼쳐져 있다.
단 한 번의 ‘듣지 않은’ 벨소리가 울린 바로 다음날, 한 어린 흑인 소녀가 근처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그녀는 전날 벨소리의 주인공이다. 병원 폐회로텔레비전(CCTV)에 찍힌 그녀의 모습은 한눈에도 매춘부 같은 차림이고,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던 듯하다. 어찌 보면 ‘뻔하고 흔한’ 사건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무도 그녀의 이름을 모르고 누구도 그녀를 찾지 않는다. 그리하여 제니는 그 소녀가 누군지를 밝히는 일에 직접 나선다. 그냥 뒀다가는 이름도 없이 매장될 그 소녀의 이름을 찾아주기로 한 것이다.
시작은 ‘상식 밖’ 선택
여기에서 왜? 라는 질문이 등장한다. 제니는 왜 그 소녀에게 책임감(또는 죄책감)을 느끼는가. 이 소녀의 사인은 시급한 응급처치가 필요했던 병이나 부상도 아니었다. 그녀는 병원 벨을 누른 뒤 다른 곳에서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죽었다. 이건 사고일까 아니면 사건일까? 어느 쪽이든 그녀가 소녀의 죽음에 ‘직접적’이고 ‘객관적’인 책임은 없어 보인다(영화 속 다른 캐릭터들도 그녀에게 계속해서 이런 점을 상기시킨다. “당신 책임은 아니에요.” “누구라도 그랬을 거예요.”).
언제나 그렇듯 이 지점, 즉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선택의 순간은 각본·연출·제작자인 다르덴 형제(장피에르 다르덴과 뤼크 다르덴) 영화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다. 우리 대부분의 ‘상식’에서 벗어난 선택, 놀람 반 놀림 반 섞어 “왜 저래?”라는 한마디를 던질 법한 그 선택은 영화의 출발점이자 추진체다. 그 추진체의 연료는 물론 ‘그렇다면 그 선택은 주인공을 어디로 데리고 갈 것인가?’라는 호기심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노운 걸>에서 한 가지 더, 이전의 다르덴 형제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연료가 첨가돼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장르적 틀이라는 연료다. <언노운 걸>이 도입하고 있는 장르적 틀은 흔히 ‘필름 누아르’라고 불리는 하드보일드 계열 영화(또는 탐정소설)의 이야기 구조다.
주인공 의사 병원 벨 누르고 숨진
흑인소녀 신원 찾아나서며 극 시작
환자 심박수로 단서 얻는 장면 등
하드보일드식 이야기 구조로 전개
사건 진상에 대한 궁금증 이어지나
전작들 깊은 울림엔 미치지 못해
평범한 개인의 순간적 선택 통해작지
만 확실한 ‘선의’ 가능성 제시
그녀는 의사지만, 안락의자형 탐정들처럼 자리에 앉아 머리를 굴리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발을 움직여 현장에 가고, 환자들을 만나 묻고, 사진을 들고 탐문한다. 의사라는 직업은 보통은 사람들의 경계의 문턱을 낮춰주는데다, 제니는 작은 병원의 의사로서 지역의 여러 사람들의 주치의를 맡고 있다. 그러니 탐문과 수사라는 면에서라면 그녀는 샘 스페이드나 필립 말로나 루 아처 같은 사립탐정들이 처한 입장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다. 요컨대 의사라는 제니의 ‘타이틀’은 그녀의 탐정면허증이고 왕진가방은 권총인 것이다. 물론 그녀는 여성이고 하드보일드 탐정들 같은 완력의 소유자는 아니다만.
아무튼, 하드보일드의 세계에서 늘 그렇듯 ‘수사’가 계속되자 제니 주변의 기류 역시 험악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그녀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적대적으로 변한다. 어떤 환자 가족은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하려 든다. 경찰은 그녀에게 사건 주변을 기웃거리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그녀의 차를 쫓아온 깡패가 위협과 경고를 해온다. 하지만 그녀는 그 길에 우연히 마주친 ‘단서’를 쫓아 곧바로 차를 유턴시킨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는다. 하드보일드 탐정들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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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언노운 걸> 속 세계는 잔인하며 인정사정없는 우리 현실을 그대로 닮아 있다. 오드(AUD)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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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가 탐정으로서의 면모를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은 환자의 심박수를 체크하면서 단서를 얻는 장면에서다. 의사라는 직업적 특성을 탐정물스러운 추리 과정에 재치 있게 적용한 이 장면은, 아마도 다르덴 형제의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장르적인 색채가 강한 장면일 것이다. 그런데 다르덴 형제가 장르적인 틀을 도입했다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동안 잊기 쉬운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순전히 장르라는 관점에서만 본다면 이 영화의 ‘미스터리’는 그다지 놀랍지도 치밀하지도 않다는 점이다. 장르적인 틀에 짜넣어진 미스터리는 결국, 그 마지막 카드를 뒤집을 때 지금까지의 ‘조이기’에 상응하는 반전이나 깜짝 효과에 대한 기대를 부르기 마련인데, <언노운 걸>이 뒤집은 마지막 카드는 앞서 말한 것처럼 그런 기대를 충족시키기엔 밋밋하다.
묵직한 성찰은 아쉽지만…
사실 일종의 퍼즐(또는 게임)로서의 미스터리로만 본다면 이 영화보다 흥미진진하고 기발한 이야기들은 얼마든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그런 것은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장르적 틀을 도입해서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그리고 거꾸로 장르적 틀을 도입한 것이 그 이야기를 하는 데 얼마나 상승효과를 가지고 왔는가, 일 것이다.
<언노운 걸>이 이전 다르덴 형제의 걸작들이 안겨왔던 소름 끼치도록 예리한 통찰과 묵직한 성찰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제니가 풀어나가는 미스터리의 끝에서 드러난 사건의 전모는, 물론 ‘법적 책임 없음’, ‘고의성 없음’ 같은 단어 뒤에 숨어 목숨을 부지하는 우리들의 졸아붙은 책임감의 맨얼굴을 낱낱이 비춘다. 하지만 그것은 영화가 맨 처음 전제하고 들어갔던 ‘귀 기울여 듣기, 고개 돌려 지나치지 않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무엇인가를 드러내주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아쉽게도.
사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은 어떻게 얘기하더라도 ‘편안하고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우리의 이기주의와 위선에 들이댄 확대경이 되었건(<자전거를 타는 소년>), 분노와 용서에 대한 숭고한 침묵이 되었건(<아들>), 사랑과 죄책감과 모성을 모두 감싸 안는 평온이 되었건(<로나의 침묵>), 배려와 연대의 의미에 대한 찬가가 되었건(<내일을 위한 시간>), 그 밖의 무엇이 되었건, 그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주는 전율과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때로는 불친절함을, 때로는 무뚝뚝함을, 때로는 어리둥절함을, 때로는 불쾌함을 몸으로 뚫으며 관통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그들의 영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고, 그것을 온전히 해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봐 왔던 것들을 완전히 초월하는 뭔가를 만나게 된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을 통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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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덴 형제는 평범해 보이는 한 개인이 내리는 순간적 선택을 통해 작지만 확실한 선의의 가능성을 끄집어내 보여준다. 오드(AUD)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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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노운 걸>이 택한 장르적 틀과 사건의 진상에 대한 궁금증이 그 마지막 장면에 도달하기까지의 진입장벽을 낮춰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이 보여 온 ‘인간 내면이야말로 가장 흥미로운 미스터리’라는 대전제의 힘을 상쇄시키는 효과 또한 가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다르덴 형제의 열 번째 장편인 <언노운 걸>은 그들의 전작들이 가닿지 못한 새로운 영역에 도달하지도, 그들의 걸작들이 남긴 깊은 울림을 재현하지도 못한 범작에 머무르고 말았다는 느낌이다. 아델 에넬의 강단 있는 연기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늘 그렇듯, <언노운 걸>은 가치 있는 영화다. 영화 속 인물들을 둘러싼 세계는 더할 나위 없이 피폐하고, 잔인하고, 야비하고, 인정사정없는 우리 현실을 그대로 닮아 있다. 하지만 다르덴 형제는 미미하고 평범해 보이는 한 개인이 내리는 순간적 선택을 통해 작지만 확실한 선의의 가능성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보여준다. 그 선택의 대가로 현실에 지불해야 하는 노고의 무게를. 그것은 일개 미약한 개인으로서는 감당하기 결코 쉽지 않은 무게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선의’, ‘호의’, ‘희생’, ‘손 내밀기’ 같은 단어들을 진열장 안의 선언이나 구호가 아닌 실물로 만질 수 있게 된다. 그 생생한 감촉은, 모든 선언적 언사들이 절정에 치달아 있는 이 정치의 계절에, 정상에 오르기 직전 숨을 고르며 마시는 물 한모금처럼 명료하고 쓸모 있다.
▶ 한동원 <적정관람료> 편집장.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의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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