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의 한 장면. ‘불순’한 교도관 삼촌을 둔 연희는 같은 학교의 ‘운동권’ 선배에게 끌리면서 자신의 내면과 충돌하게 된다. 씨제이엔터테이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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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한동원의 영화 감별사
1987
영화 <1987>의 한 장면. ‘불순’한 교도관 삼촌을 둔 연희는 같은 학교의 ‘운동권’ 선배에게 끌리면서 자신의 내면과 충돌하게 된다. 씨제이엔터테이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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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품부터 닭장차·백골단 등장에
최루탄, 셔터 내리던 소리까지
‘6월항쟁’ 생태복원급으로 재현 박종철·이한열 죽음에 집중해
이야기 풀어냈지만, 가해자를
무조건 ‘악마’로 그리지 않고
저마다 사연 담아 입체적 연출 예컨대 무소불위 권력의 집행자인 남영동 대공분실의 수괴 ‘박 처장’(김윤석) 캐릭터를 보자. 이 영화의 명실상부한 ‘악의 축’인 그에게도 ‘빨갱이’에 대해 거의 사이비종교 수준의 맹목적 적개심을 품게 된 개인적 배경을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진다. 박종철을 고문해 살해한 형사들의 리더인 ‘조 반장’(박희순)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는 권력의 사냥개로서 무시무시한 가해자였던 모습뿐 아니라 불리한 국면 돌파를 위해 꼬리를 자르려는 권력에게 버림받은 피해자의 모습도 똑같이 부각시킨다. 즉 <1987>은 가해자들을 ‘뿔 달린 악마’로 그리지 않는다. 그들이 ‘빨갱이’라는 주문으로 행하는 눈먼 단순화를 재탕하지 않는다. 이런 시선은 반대쪽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부검 없이 박종철의 시신을 즉각 화장하라는 남영동의 압박(사실상 지시)에도 불구하고 부검을 밀어붙이는 서울지검 공안검사 ‘최 검사’(하정우) 캐릭터는 망토 두른 정의의 사도가 아니다. 그의 돌출 행동의 가장 큰 동기는 검찰도 밟고 넘어서는 남영동의 월권에 대한 분개다. 이것은 첫 사망진단을 한 의사와 부검의의 양심선언, 그리고 이를 알리려는 기자들의 숨은 노력 못지않게 권력기관 내의 반목과 알력이 박종철이라는 불씨를 살린 핵심고리였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이에 대한 진위 여부를 떠나 <1987>이 취하고 있는 입체적인 태도는 ‘처음부터 결론내고 들어가는 빤한 이야기’라는 함정으로부터 영화를 구해냈다. 영화의 또 다른 3분의 1은 고문 경찰들이 수감된 교도소의 교도관인 ‘한병용’(유해진)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한병용의 동료 교도관과 수감 중이던 재야인사 ‘이부영’(김의성)의 암약으로 교도소 내부에서 얻게 된 정권의 사건 은폐, 축소 시도의 진상을 외부로 알리려는 노력은 당시 일상다반사였던 사복경찰들의 불심검문 등과 맞물리면서 스릴러풍의 긴장감마저 자아낸다. 외부에서 그 정보를 받아 ‘적절한 통로’로 넘겨주는 역할을 맡은 시국수배자 ‘김정남’(설경구)이 등장하면서부터 영화는 은신, 변장, 그리고 형사들의 추적과 따돌림 등을 수반하며 거의 추격액션의 양상까지 띠게 된다. 그리고 영화의 나머지 3분의 1은 교도관 ‘한병용’의 조카인 87학번 대학신입생 ‘연희’라는 캐릭터가 중심이 되어 전개된다. 보통사람들의 청춘, 그 자화상 ‘남영동-의사-검사-형사-기자’의 이야기와 ‘교도관-재야인사’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하체라면, 6월 항쟁의 불씨이자 밑불이었던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는 마지막 대목은 이 영화의 가슴을 이룬다. ‘연희’가 우연한 사건을 통해 학교 선배와 만나면서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1987>은 청춘물, 그것도 무척 풋풋하고도 섬세한 청춘물이 된다. 툴툴거리면서도 ‘불순한’ 교도관 삼촌의 ‘불순한’ 심부름을 마다하지는 않는 ‘순수한’ 대학생 연희가 대변하는 것은 사건 안의 내부자들이 아닌 외부자들, 즉 ‘보통사람들’(이 영화의 원래 제목이었다)의 시선이다. 가치 있는 것들을 위해 목숨까지 걸고 싸우는 사람들을 애써 외면하거나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으로 냉소하기까지 하는 우리네 보통사람들의 그것 말이다. 물론 영화는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 식구들 생각은 안 해요?”라며 울먹이는 그녀에게, 줄곧 자신과는 다르다 여기던 사람들의 실제 모습을 천천히 알아가도록 한다. 역시나 현미경적 디테일로 재현된, 당시의 청춘이 흔히들 겪었을 법한 일을 통해서 말이다. 그 자체로 영화 한 편은 충분히 만들어질 법한 이야기에는 설익은 건강식을 억지로 입으로 밀어 넣는 우격다짐은 없다. 다른 캐릭터들에게 그랬듯 <1987>은 연희의 침묵 뒤에 숨어 있던 사연을 들려준다. 그것은 우리 보통사람들이 충분히 공감할 법한 것이다. 더불어 그녀가 그 반대쪽에 있는 ‘운동권’ 학교 선배에게 끌리면서 자신의 내면과 충돌하게 되는 이유 역시 그 당시 청춘들이 충분히 겪어봤을 법한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다. <1987>은 그 시절의 청춘들이 싸울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었던 인간의 체온이라는 핵심을 과장이나 손실 없이 포착해낸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는 우리 안에 잠자고 있던 인간을 일깨우고, 자칫 ‘잘 몰랐던 역사 구경하기’에 머물 수도 있었던 내용을 우리 모두의 드라마로까지 확장시킨다. 물론 무한경쟁의 그림자 짙게 드리운 2017년의 오늘은, 그때 우리가 품었던 ‘그날’과는 꽤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를 통해 ‘그날’을 품었던 30년 전의 우리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 우리를 기억한 채 2018년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만으로도 <1987>은 충분히 이유 있는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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