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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9.29 13:57 수정 : 2018.09.29 16:41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암수살인

영화 <암수살인>은 범인과 추적자뿐 아니라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거의 동등한 관심을 쏟고(또는 촉구하고) 있다. 쇼박스 제공
타이틀 자막에서 ‘아무도 모르는’이라는 해설을 붙여주고 있을 만큼 ‘암수’(暗數)는 그리 눈에 익숙한 단어가 아니다만, 이 영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지금쯤 이 영화의 출발점이 된 에스비에스(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감옥에서 온 퍼즐’ 편 말미에 등장하는 해설, 즉 ‘암수범죄=hidden crime=실제 범죄는 발생하였으나 수사기관이 인지하지 못해 공식 통계에 잡혀 있지 않은 숨겨진 범죄’ 정도는 파악하고 계시리라 믿는다.

이 해설은 영화 속 대사로도 그대로 등장하는데, 영화에는 이런 암수사건들뿐 아니라 수사는 되었으되 아직 해결되지는 않은 미제사건도 함께 섞여 있는바, ‘암수살인’이라는 제목이 꼭 백퍼센트 정확한 제목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암수살인>이라는 제목은 합당하다. 영화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핵심을 생각하면 그렇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화법

영화는 형사 ‘김형민’(김윤석)이 부산 자갈치시장의 칼국수집에서 정보원 ‘강태오’(주지훈)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강태오는 예전에 자신이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날랐던 짐이 왠지 토막시체(식사 전이시라면 죄송하다)인 것 같더라는 섬뜩한 얘기를, 집 앞 편의점 다녀온 얘기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전하고, 형사 김형민은 이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받아들이면서 강태오로부터 추가 정보를 살살 끌어내려 한다.

노련함과 노련함, 선수와 선수의 첫 만남을 표현하는 데 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라는 태도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을 것인데, 이 ‘아무렇지도 않은’은 비단 이 장면에서뿐 아니라 <암수살인>의 톤 전체를 지배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예컨대 살인 및 사체유기죄로 교도소에 수감된 강태오가 김형민에게 전화를 걸어 본격 게임을 걸어오는 장면을 보자. 이 장면에서 강태오는 “일곱명이예”라는 결정적인 대사를 던진다. 그런데 이 대사는 전화를 끊기 직전 간신히 들려오는 한마디로 처리돼, 관객들의 청취능력을 시험에 들게 한다. 물론 이 대사는 그 뒤에 이어지는 “총 일곱명입니더. 제가 죽인 사람들이예”라는 대사로 곧 보강되긴 한다만.

그것은 이 영화가 인물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예컨대 주인공 김형민의 든든한 조력자로서 일종의 ‘버디’를 이루는 후배 형사 ‘조형사’(진선규) 캐릭터 역시, 출발부터 ‘주인공 보조’라 적힌 완장이라도 찬 듯 충직함 및 인간미 발산하는 여타의 ‘버디’들과는 달리, 어느샌지 모르게 이야기 안으로 들어와 극의 중반쯤에야 슬그머니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렇게 굳이 친절본위하려 하지 않는 화법은 영화가 고수하고 있는 진한 부산 사투리 대사로도 드러나는데, 필자처럼 부산어에 조예가 깊지 않은 관객들에게 이 리얼리티는 대사 전달에 종종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런 무뚝뚝함은 점점 사소하게 느껴지며,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오기까지 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이 영화가 풀어나가고 있는 이야기가 그러한 무뚝뚝함을 상쇄하기에 충분할 만큼 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최근 스릴러를 표방하는 한국영화들이 거의 케이에스(KS) 규격처럼 채택하고 있는 각종 인공첨가물(예컨대 ‘쿵’으로 시작되는 긴장 압출 음악, 졸음방지용 돌발 효과음 삽입, <추격자> 풍 달리기 액션 등등) 및 합성향신료(억지 반전, 얄팍한 낚시 등)의 인공적인 맛에 우리가 어지간히 지쳐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범인뿐 아니라 희생자 향한 관심 촉구

수사물이라는 면에서 이 영화가 가지는 가장 독특한 점은, 형사 김형민이 찾는 것이 범인이 아닌 범인 강태오가 저질렀다고 털어놓는 범행 그 자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암수살인>은 살인범이 아닌 살인 그 자체를 추적하는 수사물인데 ‘그 살인은 실제로 벌어진 사건인가?’로 요약되는 김형민의 질문은, ‘이 살인은 실제로 그가 저지른 살인인가?’를 추적하던 <조디악>(2007)의 추적자들(형사, 기자, 그리고 덕후)이 쫓던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재미있게도 <암수살인>과 <조디악> 사이에서는 범인이 던지는 힌트와 그를 추적하고, 휘둘리고, 걸러내는 추적자의 두뇌/심리대결, 그리고 추적자들이 감내해야 하는 엄청난 노동과 거의 인생을 건 도박을 벌이는 그들이 감수해야 할 위험 같은 공통점 또한 보인다.

하지만 두 영화 사이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암수살인>이 범인과 추적자들만이 아니라, 피해자에 대해서도 거의 동등한 관심을 쏟고(또는 촉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범인이 아니라, 범죄라는 것 자체를 세상이 모르고 있는 범죄에 희생된 사람들을 찾아내는 일. 그 일이 경찰관의 경력관리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이미 잡힌 놈 죄 하나 더 밝히는 것보다, 새로운 놈 하나 더 잡아들이는 게 훨씬 고과에도 좋다”는 형사과장의 대사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따라서 이 영화는 결국 필연적으로 장인정신에 대한 영화가 된다. ‘장인정신’이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본인에게 득 될 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단지 그것이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시간과 품을 기꺼이 들이는 흔치 않은 기질을 말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방송에 소개된 실화를 소재로
숨겨진 범죄 찾아가는 영화
살인범 아닌 살인 그 자체 추적
세상이 모르는 피해자 찾는 형사

긴박감 넘치는 추격물이라기보다
집요한 장인의 ‘수사 노동’ 기록
짙은 사투리가 몰입 방해하지만
좋은 이야기의 힘과 가치 일깨워

그러니까 이 영화는 긴박감 넘치는 추격액션 같은 것이 아닌, 한 집요한 장인의 고되고도 더딘 노동을 담은 기록물에 더 가깝다. 아, 오해는 말자. 영화 자체의 리듬과 속도는 고되고 더딘 것과는 정반대다. 거짓과 사실을 교묘히 섞어가며 형사와 밀당 게임을 벌이는 범인, 그리고 그에게 인생 전체를 잡아먹힐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보이지 않는 희생자(말하자면 ‘암수 희생자’)를 한 명이라도 더 찾아내려는 형사의 수 싸움, 그리고 그 싸움의 결과 하나씩 드러나는 진실(또는 더 깊어지는 미궁) 등등, 스릴러/추리물로서의 이 영화가 끌어내는 흥미진진함은 실화에 중심을 받쳐두고 끌어낸 것이기에 더욱 밀도 높다. 아무튼.

‘노동으로서의 수사’라는 면에서 이 영화는 최근작들 중 <스포트라이트> 또한 떠올리게 한다. <보스턴 글로브>의 탐사보도팀이, 회사 지하자료실에 처박혀 있던 몇년간의 기록을 일일이 대조해가며 성추행 혐의가 있는 신부들을 찾아내던 장면이 <스포트라이트>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였듯, 범인이 시신을 묻었다고 한 장소를 집단수색하던 경찰력이 철수해버리자 혼자 삽을 들고 무덤 주위를 파헤치기 시작하는 김형민의 모습, 또는 팔뚝만한 쥐가 돌아다니는 곳에 처박혀 있던 사건 기록들을 일일이 들춰보는 김형민과 그의 유일한 조력자인 후배 조형사의 모습은 사실상 <암수살인>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스포트라이트>의 기자들이 행했던 취재노동이 그러했듯 <암수살인>의 수사관들의 수사노동은,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공감과 위무에 다름 아니다.

노동으로서의 수사

그리고 <암수살인>의 형사 김형민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간다. 그는 흡사 무당인 듯 ‘아무도 모르게’ 죽은 사람들을 진혼한다.

그가 진혼하는 사람들은, 보통 영화들이 후면조명과 산광필터로 멸균된 액자 속에 모셔진 한없이 선량하고 한없이 순수한 천사 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택시에서 오바이트를 한 다음 청소비라며 기사에게 냅다 돈을 집어던지는 노래방 도우미이기도 하고, 국가고시에서 계속 낙방하면서 그 불안과 외로움을 술로 잊으려는 취준생이기도 하다. 그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을 해친 범인을 찾아낸다 한들 알아줄 이 하나 없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서 진혼하려는 형사 김형민의 모습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 깊은 울림을 안긴다. 그가 하고 있던 수사야말로 (적어도 티브이에서 다뤄지고,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수사, 즉 ‘암수수사’이기 때문이다. 그 암수수사는 고과점수, 성과, 진급, 호봉 같은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데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우리들에게는 거의 ‘아무도 모르는’ 것이 되어버린 가치다.

농도 높은 부산 사투리는 종종 귓구멍 밖으로 튕겨 나간다. 플래시백이 너무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그 복잡다단한 사건의 재구성에서 애로사항은 십분 짐작이 간다만, 그래도). 하지만 그런 점들은 이 영화의 장점을 누르지 못한다. <암수살인>은 규모와 베팅의 논리가 온통 지배하는 현재의 한국영화판이 잊어가는 한 가지 믿음을 일깨운다. 어떤 물량과 비주얼도 좋은 이야기만큼 강한 힘을 가질 수 없다는 믿음, 오래전의 우리가 공유했던 그 믿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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