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여러분이 웃고 울었던 현장에 한겨레 사진기자들도 있었습니다. 한 해를 정리하는 맨 마지막날까지 그 마음에 남았던 사진 한 장들을 모아봤습니다.새해에도 우리 사회와 사람들의 마음을 잇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1. 고독한 검투사-김정효
직권남용과 직무유기
청와대, 국회 등을 출입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진기자들은 출입처가 없다. 출입처가 없는 사진기자들을 우리는 스스로 ‘아스팔트’라고 부른다. 길 위 여기저기가 출입처라는 뜻이다. 그 ‘아스팔트’들이 지난 겨울, 출입처처럼 자주 가던 곳이 ‘박영수 특검’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사무실이 입주한 건물은 뒤쪽 주차장에 특검으로 올라가는 승강기가 있는 구조였다. 그 차가운 주차장이 ‘아스팔트’들의 사실상 출입처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최순실을 봤고 김기춘과 조윤선, 이재용, 안종범, 문형표, 김종, 차은택, 장시호, 최경희 그리고 우병우 등을 봤다. 이미 포승에 묶여 온 자도 있었고, 특검에 다녀간 뒤 수갑을 찬 사람도 있었다.
특검 수사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던 2월22일 아침, 어느 때보다 특검 주차장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이날 새벽 법원은 특검이 청구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구속영장을 기각했고 특검팀은 평소보다 1시간여 일찍 출근해 대책회의를 했다. 특검팀의 출근 모습을 본 기자는 거의 없었다. 조용히 눈이 내렸다.
‘눈 스케치’라도 하자며 카메라를 들었을 때 ‘우병우 수사팀’의 이용복 특검보가 내려와 담배를 피웠다. 왼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눈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등이 쓸쓸해 보였다. ‘고독한 검투사’가 떠올랐다. ‘싸움에서 졌다’는 개인적인 감상 때문이었으리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차마 묻지 못했다.
그날의 싸움에서 졌을지 모르지만 승부는 끝난 게 아니었다. 어쩌면 저 순간 이용복 특검보는 다음 수를 구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특검이 우병우 전 수석을 구속하지는 못했지만 그 수들이 쌓여 우 전 수석은 결국 12월15일 구속됐다(고 믿는다).
지금 사진을 다시 보니 이 특검보의 넓은 어깨가 듬직해 보인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2. 서울구치소 앞 100미터 전-강창광
뇌물수수 등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3월31일 새벽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 들어서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chang@hani.co.kr
서울구치소 앞 100m 전. 3월31일 새벽 4시43분21초.
한 때 트레이드 마크였던 ‘올림머리’를 내린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관들과 함께 승용차 뒷자리에 앉아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로 들어가고 있다.
역사적인 순간이다. 누가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어딘 가를 응시하는 듯한 그의 눈빛에서는 반성의 기미를 찾을 수 없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보도에서부터 시작된 ‘대통령 탄핵’이라는 한 편의 대하드라마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다.
박 전 대통령은 1998년 4월2일 대구 달성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된 뒤 정치인의 길에 들어섰지만, 최순실과의 인연에서 알 수 있듯 1970년대 말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실질적인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할 때부터 공직에 발을 들여 놓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지내왔는지 ‘국민 행복시대’를 외치며 대통령에 당선 된 그의 실체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어쩌면 과거로 돌아가 왕조시대 공주나 왕비가 어울렸음 직하다 말하면 무리일까?
한여름도 지나 한겨울을 맞은 구치소 생활에 적응했는지,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상납 의혹에 대한 검찰의 구치소 방문조사조차 거부한 채 ‘정치보복'이라며 스스로 구치소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갇혀 있지만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기득권 극우세력은 여전히 여의도를 떠돌며 호시탐탐 권력을 다시 찾을 기회만을 엿보고 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잘 보이지도 않지만 진정한 ‘개혁의 길’로 떨쳐나서는 일을 더는 미룰 수 없는 이유이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3. 장미꽃이 시들기 전에-박종식
전국학교 비정규직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추석 연휴가 시작된 지난 10월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을 하던 중 조합원이 보내온 장미를 머리에 꽂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학교비정규직 노조 관계자는 "지역의 한 조합원이 장미가 시들기 전에 학교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며 보냈다"고 설명했다. 2017.10.1 한겨레 박종식 기자
“제가 보낸 장미꽃이 시들기 전에 우리 동료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2017년 10월1일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농성 중이던 학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은 지역의 조합원이 보내온 장미꽃을 서로의 머리에 꽂아주며 까르륵 까르륵 웃었다.
“너 머리에 그렇게 꽃을 꽂고 있으니까 꼭 슈렉같아”
“그러는 너는 웰컴투 동막골에 나온 모자란 여자애 같아”
추석 연휴가 시작됐지만 이들은 가족이 아닌 동료들과, 집이 아닌 길에서 함께 하고 있었다. 이들은 정규직에 준하는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삭발을 하고 닷새째 단식농성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력은 두 달여가 지난 12월15일 결실을 맺었다. 서울시교육청과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대단체인 전국학교비정규직연대회는 비정규직의 처우개선을 약속하는 단체임금협약을 맺었다. 올 한해의 끝자락에 문재인 정부의 핵심공약 중 하나였던 인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이 시작됐듯, 내년 한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한명 한명의 장미꽃이 시들기 전에 정규직 전환이 이뤄지기를 기대해 본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4. 민호의 마지막 등굣길-백소아
특별감찰관법 위반 등 혐의로 특검이 청구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에 대한 구속영장을 법원이 기각한 2월22일 오전 평소보다 1시간여 빨리 출근해 대책회의를 한 것으로 알려진 이용복 특검보가 서울 대치동 특검 사무실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생각에 잠겨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11월 9일 제주도 한 음료제조업체에서 현장실습 중이던 이민호군의 목과 몸통이 제품 적재기 프레스에 눌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열흘동안 사경을 헤매던 이군은 결국 11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민호의 열여덟 번째 생일을 나흘 앞둔 날이었다. 업체는 이 사고가 이군의 과실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학교는 현장실습을 나간 학생이기 때문에 학교의 책임이 아니라고 했다. 업체는 기계로 가득찬 생산라인 앞에 민호 혼자 세워두었다. 기계에 안전장치를 설치하는 건 권유사항이지 의무사항이 아니라고 했다. 학교는 학생들을 보낼 업체를 제대로 감독하지 않았다. 취업률이란 숫자에만 집중했다. 이군의 부모는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알렸다. 사람들은 분노했다. 결국 업체와 학교는 사과했다. 그리고 12월 6일 이군의 발인이 엄수됐다.
민호의 발인 전날, 제주도에는 눈이 내렸다. 하얗게 변한 길을 달려 민호는 마지막 등교길에 올랐다. 근조 리본을 단 친구들과 후배들이 민호와 함께 했다. 발인식동안 민호 부모님의 울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사랑하는 친구 민호야, 잘 가거라. 사랑하고 기억하겠다”는 고별사에 학생들은 고개를 숙였다. 민호는 스스로 특성화고를 선택했다. 어려운 집안 사정때문이었다. 꼭 취업을 하고 싶다며 자격증을 따는데 열심이었다. 받은 월급을 모두 엄마에게 맡기고 “힘들지 않냐”는 아빠의 질문에 “괜찮다”고 답하던 착한 아들이었다.
발인식 취재를 마친 뒤 학교를 바라보았다. ‘사람을 품는 학교, 꿈을 가꾸는 교실’. 그 앞에 민호가 탄 영구차량이 서 있었다. 민호는 첫 등교를 하던 날 이곳에 서서 무엇을 꿈꿨을까. 영정사진이 되어버린 졸업사진을 찍으며 어떤 졸업식을 그렸을까. 제주도를 덮었던 눈처럼, 하얗게 시린 민호의 마지막 등굣길이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5. 이용마 기자의 미소-신소영
현장실습을 하던 중 사고를 당해 숨진 고 이민호 학생의 발인이 엄수된 12월6일 오전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포산업과학고 앞에 이 군의 영구차량이 세워져 있다. 제주/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이명박 정권 때 부터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동료들이기도 한 문화방송(MBC) 조합원들의 힘든 파업 일지를 오랜 기간 취재했다. 언론의 자유를 억압당하는 그들의 심정이 너무나도 잘 이해되다가도 사실 때때로 응원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들의 파업에 담긴 진심을 의심한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드디어 오랜 기간 투쟁 끝에 자신의 일터로 돌아온 이용마 기자를 카메라 뷰파인더 너머로 보는 내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같은 병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옛 선배도 생각나는 통에 자꾸 코끝이 찡해져 취재를 마치고 서둘러 현장을 빠져나왔다. 다행이다. 이용마 기자가 마이크를 쥐고 일터로 돌아온 소감을 말하고는 활짝 웃는다. 박근혜 정권이 무너지고 MBC에 일어난 기적처럼, 이 기자가 건강을 되찾아 마이크를 잡고 다시 방송을 할 수 있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6. 엄마의 ‘그날’-강재훈
2012년 문화방송 파업 당시 해
엄마의 30년은 아직도 아프기만 하다.
고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씨와 함께한 ‘6월9일’
“‘한열아 왜 그때 그 자리에 서 있었어?’ 묻고 싶다”
“한열이가 위급해요.” 다짜고짜였다. “왜 그러냐”고 묻자 “위급합니다”란 말만 되돌아왔다. 1987년 6월9일 오후에 걸려온 전화였다. 사흘 전인 6일 아침 전라도 광주 고향 집에 왔다가 7일 밤 서울로 돌아간 아들이 위급하다니. 서울 버스터미널에서 선생님과 학생들을 만나 연세대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갔다. 아들은 산소마스크를 쓰고 누워 있었다. 최루탄을 머리에 맞았다고 했다. 아들이 ‘데모’하는 걸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남자가 안 하면 못 쓰고 뒤에서 해라, 뒤에서.” “엄마, 아들을 믿으세요. 뒤에 서서 해요.” 어머니를 속인 아들은 26일 동안 누워 있다 떠났다. 7월5일 새벽 2시5분께였다. 2017년 6월9일 고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의 하루를 동행하며 들었던 말들. “엊그제 일 같다”는 어머니는 여전히 30년 전 그날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신촌 이한열기념관.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7. 선생님 힘 내세요-강재훈
여든 여섯 평생을 민주화와 통일운동 현장에서 스스로 촛불이 되어 몸을 사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이 날(2017년 9월 14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적폐 청산 '문화예술 한바탕' 행사장)도 가장 먼저 무대에 올라 문재인 정부의 사드배치를 강력히 규탄하는 발언을 한 뒤 주변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무대를 내려왔다. 그의 입을 떠난 목소리는 아직도 호랑이의 으르렁쩌렁 같았지만 몸은 이내 힘든 기색이 역력해 보인다. 단하의 대기실에서 가수 이은미씨가 힘겨워 하는 백소장을 따뜻하게 안아주며 건강을 걱정하는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8. 신발과 신발 사이-강재훈
2015년 11월 14일 서울로 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농민 백남기의 하얀 고무신이 툇마루(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 밑에서 1년 가까이 주인을 기다렸다(왼쪽 사진). 남편의 고무신이 있던 자리에 이제 혼자 남은 아내의 신발이 남편의 부재를 말하고 있다(오른쪽). 백남기 농민이 쓰러져 사경을 헤매던 2016년 6월과 그가 떠나고 꽉 차버린 1년. 그 사이. 하얀색 고무신과 파란색 고무신 사이.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 사이. 그 자리에 그대로인 재떨이만이 ‘형님’ 생각나 찾아오는 후배들의 재떨이로 자리를 지키며 하늘과 땅만큼 먼 ‘그 사이’를 이었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9. 광장에 선 권력, 빼앗긴 뺨-이정우
구중궁궐에 은둔하던 권력이 광장으로 나섰다. 삼엄한 경호속의 청와대, 그 안에서도 사적 공간인 관저에서 국사를 처리했던 최고권력자. 촛불의 함성에 소스라쳐 청와대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을 읊조리며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는 또다른 최고권력자. 시민들의 표로 선출된 권력이 시민과 유리되는 모순이 한동안 지속됐다. 탄핵으로 대통령선거가 앞당겨 치러진 지난 5월9일, 자정이 임박해 당선이 확정된 새 대통령이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 앞에 섰다. 당내 경선을 통해 그와 후보 자리를 다퉜던 경쟁자가 막 탄생한 권력자의 뺨을 부여잡고 격하게 입을 맞췄다.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 사이에선 폭소와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리곤 일제히 핸드폰을 치켜들어 이 장면을 촬영하기 바빴다. 이들 틈에 사다리를 세우고 사진을 찍던 기자는 `안 보이니 좀 비키라'는 지청구에 최대한 움츠린 채 이리저리 비켜가며 셔터를 눌러야 했다. 모두가 주머니에 고화질 카메라(휴대전화)를 넣어다니며 언제라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막 구워낸 따끈따끈한 사진을 유포하는 이 시대에, 잘 보이는 자릴 선점했던 기자의 특권(?)은 내놓은 지 오래다. 최고권력자도 광장에서 뺨을 내줘야 하는 마당이니까.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10. 참 예의바른 대통령-김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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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민심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요구했고 국회가 탄핵안을 의결했으며 드디어 지난 3월 헌법재판소가 박 대통령을 파면했다. 이어 치러진 선거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에 취임했고 벌써 8개월여가 지났다. 문재인 대통령의 8개월은 참으로 바쁜 나날이었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문 대통령의 의지는 확고했고 아직도 실천 중이다. 하지만 청와대 출입기자인 나에게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보다 훨씬 더 다가오는 것이 있다. 문 대통령의 국민에 대한 생각과 행동이다. 어느 행사를 가더라도 국민과의 소통을 소중히 여기고 국민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모습이 이제까지의 어느 대통령들의 모습과 다르다. 시상식에서는 자신의 무릎을 낮추어 시상하고 청와대 행사 도중 청와대를 방문한 학생들과 잠시 시간을 내어 사진도 찍고 대화하는 모습이 신선하다. 이제 문 대통령의 남은 임기는 4년여, 이런 신선한 모습이 이어져 성공한 대통령으로 국민이 기억하길 바란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11. 아, 밀양-김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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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11일 새벽, 할매·할배들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는 경남 밀양의 산과 들판에 흘러넘쳤다. 온 나라가 세월호 참사로 슬픔에 잠겨 있을 때 국가는 행정대집행을 명령했다. 세월호 참사에는 느리고 무능했지만, 행정대집행에는 신속하고 유능했다.
밀양 행정대집행 3년을 맞아 밀양 주민들과 전국에서 온 탈핵 시민들이 6월17~18일 이틀 동안 문화제와 송전탑 걷기 행사를 했다. 127, 129번 송전탑 농성장에는 거대한 철구조물이 괴물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 아름다운 산 능선을 거대한 선과 구조물이 점령했다. 주민들의 처절했던 투쟁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송전탑이 건설된 장소에는 어김없이 ‘접근금지, 765㎸고압전기 송전중으로 전력 시설물 손괴 시 전기사업법 100조에 따라 형사처벌 받을 수 있습니다. 한국전력공사’라는 경고판이 세워져 있다. 주민들은 경고판 바로 앞에 ‘불법 송전탑 철거 계고장’을 세웠다. 계고장에는 ‘필요하지도 않은 핵발전소와 송전탑을 오직 핵마피아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주민들의 피땀을 짓밟고 대대손손 물려주어야 할 아름다운 이곳을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버렸다’는 문구와 함께 지금 당장 송전탑을 철거하라는 요구가 담겨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014년 2월 밀양송전탑 농성 현장을 방문해 온종일 주민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정부는 신고리 핵발전소 5, 6호기 건설을 일시 중단하고 사회적 대화를 결정했다. 사회적 대화는 공사재개로 결정이 났지만, 밀양 할매·할배들의 12년 동안의 송전탑 투쟁은 핵발전소에 의지해온 에너지정책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12. 화상산재 사각지대에 놓인 이주노동자-김성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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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봄, 화상 산업재해(이하 산재) 관련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 취재를 시작했다. 취재를 시작한 지 한달 뒤, 경기도 부천에 사는 한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로부터 같은 고향 출신의 화상 산재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며칠 뒤 카메라 장비를 챙겨 포항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해가 저물 무렵 도착한 포항의 이주노동자센터에서 화상으로 얼굴이 심하게 훼손된 피로르스씨를 만났다. 화상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가슴에 안고 있었고, 눈에 맺힌 눈물 너머에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선명히 남아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심리치료는 받은 적 없었다. 한국어가 서툰 그가 모국어인 크메르어로 심정을 토로할 수 있는 대상은 심리치료사가 아닌 고향에 있는 가족뿐이었지만, 본인보다 힘들어할 어머니를 생각하며 사고 사실을 숨겼다. 27만여 명의 이주노동자 사이에는 제2, 제3의 피로르스가 수없이 많았지만, 세월호 참사와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메르스, 최순실 국정농단 스캔들 등 급박하게 돌아가는 일정으로 화상 산재 피해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취재는 간헐적으로 이뤄졌다. 보도 역시 오랫동안 미뤄졌다. 4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포항에 있는 한 이주노동자센터 활동가는 늘 같은 자리에서 화상 피해 이주노동자들을 돌보며, 그중에 알게 된 피해자들의 사연을 수시로 기자에게 소상히 전했다. 그의 도움으로 경남 통영에서 폰록씨를, 스리랑카 파나두라에서 딜란타씨를 추가로 만날 수 있었다. 화상을 입은 이들의 눈과 코는 문드러져 있었고 귀는 모두 타들어 가 흔적만 남아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충격이었지만, 더 큰 문제는 화상 산재 피해 이주노동자 대부분이 산업재해보상보험법 허점으로 법 이름에 명시된 ‘보상’과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데에 있었다. 화상 산재의 경우 대체로 치료 과정에서 비급여 비중이 높아 많은 피해자가 비용 부담으로 복원성형수술을 포기했다. 또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지 못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언어적인 문제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따른 보상신청과 처리 과정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산재는 이주노동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으며 또한 진행형이다. 이 끔찍한 사고가 2018년에는 반복되지 않길 바라며, 지난달 11월 말 발행된 시사주간지 <한겨레21> 1189호 표지기사와 관련해 보도된 사진 한장을 골랐다. 사진은 화상 산재를 당한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멘 피로르스 씨가 병원에서 복원성형수술을 받는 모습. (관련기사 1. ‘불타버린 코리안드림’ https://goo.gl/49emDm, 관련기사 2. ‘피로르스와 폰록은 한국을 떠날 수 있을까’ https://goo.gl/MBqur8)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13. 다시 세월호를 보내며-이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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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어느 새벽, 목포신항-철컥 철컥 30초마다 셔터 소리를 내며 카메라는 세월호 위로 쏟아지는 별들을 담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지 않고서는 차마 바라보기도 죄스러웠던 세월호를 그제서야 찬찬히 볼 수 있었다.
우리 안의 적폐가 곪아 터져 세월호가 가라앉았고, 촛불이 일어나 그 굽은 길을 바로잡기 시작하자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왔다. 그렇게 다시 바라본 세월호는 마치 2014년 4월로 돌아가 저 깊은 밤하늘로 출항을 앞둔 배처럼 보였다. 별이 된 아이들에게 가 닿을 수 있도록 카메라를 돌려 들었다. 그렇게 2014년 4월의 그 날처럼 세월호를 다시 세웠다. 저 세월호에 깊게 패인 상흔처럼 우리들 마음에도 새겨진 아픔이다. 아무리 돌이키려 해도 돌려지지 않을 비극.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잊지 않겠습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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