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7.11 22:58
수정 : 2016.07.12 11:09
지난해부터 나는 여러 건의 긴급조치 손해배상 사건에서 줄줄이 지고 있다. 70년대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고를 치른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속속 패소 판결을 받고 있는 것이다. 1심에서 문제없이 승소했던 사건들도 2015년부터는 대부분 패소로 결론이 바뀌고 있다. 2014년 1심 재판에서 승소했던 이아무개(64)씨 역시 이듬해 2심, 대법원에서 연거푸 패소 판결문을 받아야 했다.
1977년 목포의 어느 교회 전도사였던 이씨는, 교인들이 모인 곳에서 시국을 비판하는 글을 읽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이씨가 징역 1년을 선고받으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동생은 진학을 포기했고, 가족들은 이씨가 출소한 뒤로도 오랜 기간 정보요원의 감시와 사찰 속에서 지내야 했다.
1970년대 후반 시행된 긴급조치는 박정희 시대의 대표적인 악법이었다.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을 틀어막기 위해 발령한 긴급조치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술자리에서 대통령 욕을 하다가, 수업시간에 유신헌법의 문제를 지적하다가, 숱한 사람들이 수사기관에 끌려가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했다.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형기를 마친 뒤에도 위험인물로 낙인찍혀 변변한 직장을 얻기조차 어려웠다.
수십년이 지나서야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긴급조치가 민주주의에 대한 폭거였음을 확인했다. 대법원은 2013년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긴급조치는 애초부터 위헌, 무효”라고 판결했고, 헌법재판소도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긴급조치는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부합하지 않아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이씨를 비롯해 긴급조치로 처벌을 받은 사람들은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애초부터 무효인 긴급조치로 사람을 잡아 가두었다면 국가가 국민에게 불법적인 일을 한 것이다. 그로 인해 피해자들이 입은 손해를 국가가 배상해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무죄판결을 받은 이씨와 그 가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2014년 1심 법원은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니는 국가가 가해자가 되어 이씨 가족들에게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며 이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가슴속 멍울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듯했다.
그러나 대법원이 지난해 내린 판결로 상황이 뒤집혔다. 대법원은 말을 바꿔 ‘박정희 대통령이 긴급조치를 발동한 것은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라서 대통령이 정치적 책임은 질 수 있을지언정, 국가가 법적 책임을 질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수사기관이 긴급조치로 사람을 구속해 수사한 것, 법원이 유죄판결을 내린 것에 대해서도 “당시 긴급조치가 시행되고 있었으므로 위법하지 않다”고 했다.
긴급조치는 위헌이고 무효이지만, 국가가 긴급조치로 국민을 잡아 가둔 건 위법하지 않다는 대법원의 판단.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이 납득하기 어려운 대법원 판결 이후, 전국 각지의 하급심 재판부들은 일제히 결론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씨뿐만 아니라 다른 피해자들 대부분도 2015년 대법원 판결에 따라 속절없이 패소하고 있다. 하급심의 몇몇 판사들이 ‘소신 판결’로 대법원에 반기를 들었지만, 그나마도 위로 올라가면 모두 뒤집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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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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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대법원 판결 주심 대법관이 했다는 말을 어느 기사에서 봤다. 그는 “긴급조치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 배상하는 게 맞지만, 거칠게 말하면 이는 고도성장기를 누려온 50~60대 과거세대의 일에 대해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지금 세대가 세금으로 배상하는 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법원은 국가에 배상책임이 있는지 판단하면 될 뿐이다. 오래전 일이니 그냥 참으라는, 그래도 당신들은 살면서 성장의 과실을 누리지 않았냐는 억지가 대법 판결의 진짜 이유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정민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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