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10.03 22:58
수정 : 2016.10.11 11:52
[밥&법] 판결체크
권선택 시장 유죄 판결 무죄 취지로 파기
선거 앞두고 포럼 만들어 활동 가능
정치 신인들 얼굴 알리기 길 열어줘
지난 8월26일은 대한민국 정치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지도 모르는 날이었다. 정치 신인들에게 대표적 악법 조항으로 꼽혔던 선거법의 사전선거운동을 폭넓게 허용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기 때문이다. 현역 국회의원이나 자치단체장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사전선거운동의 개념을 정치 신인들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는 쪽으로 대폭 확장한 판결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조희대 대법관)는 이날 공직선거법 및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권선택 대전시장에 대한 상고심에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검찰이 권 시장에게 적용한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전선거운동 혐의(공직선거법 위반)에 대해 무죄 취지(대법관 9대3 의견)로 판결했기 때문에 권 시장은 임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공직선거법상 사전선거운동은 ‘공식 선거운동 기간 이전에 예비후보자가 당선되거나 당선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행위를 하는 것’으로 정의돼 있다. 사전선거운동을 금지하는 것은 공정한 선거를 위한 것이다. 언제나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 과열 경쟁으로 선거 비용이 많이 들게 돼 결국 경제력이 당락을 결정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는 금권정치를 조장하게 돼 민주주의에 큰 위협이 된다.
대법원은 그동안 사전선거운동을 엄하게 처벌해왔다. 현역 국회의원이나 지자체장이 아닌 정치인들이 출판기념회나 포럼 등을 통해 인지도를 높이는 것을 선거운동으로 간주해 처벌한 것이다. 권 시장은 2014년 6·4 지방선거를 1년 6개월이나 앞둔 2013년 초 지방발전 포럼을 만들어 활동해온 것이 사전선거운동으로 적발돼 기소됐다. 검찰 수사 결과 포럼 설립 무렵에 권 시장 쪽에서 선거기획안을 작성한 사실이 드러나는 등 사전선거운동으로 볼 수 있는 증거가 다수 확인됐다. 기존 판례에 따르면 권 시장은 당연히 유죄 판결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권 시장 사건을 검토한 대법관들은 기존 판례를 변경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판례 변경을 위해 전원합의체로 사건을 넘긴 대법관들은 평의 과정에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대법관들은 공정한 선거를 만들기 위한 사전선거운동 조항이 정치 신인들을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에 주목했다. 현역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유권자들에게 이름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오히려 공정한 선거를 방해하는 현실에 눈을 뜬 것이다. 다수의견에 가담한 9명의 대법관은 ‘기존 판례가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광범위하게 선거운동을 규제함으로써 대의민주주의에서 당연히 허용돼야 할 국민의 정치활동을 위축시킨다’고 결론 내렸다. 이들은 ‘선거운동 가운데 금지되는 것과 허용되는 것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수사기관의 자의적인 법 적용을 초래한다’고 판단했다. 권력의 입맛에 맞는 수사기관의 선별적 처벌이 대의민주주의를 왜곡시키고 있다고 본 것이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집권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고, 따라서 정치인이라면 그런 목적에 따라 활동을 하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기존 판례는 정치인 내면의 목적까지 처벌하는 것이라서 정치활동의 자유라는 헌법적 기본권을 침해한다.
다수의견은 이런 점들을 고려해 사전선거운동의 처벌 기준을 제시했다. ‘돈줄’은 막고, ‘입’은 열게 한다는 선거법의 취지를 살리면서 선거의 공정성을 왜곡시키지 않기 위해 크게 두가지 기준을 만들었다. 첫째, 선거에서 당선되고자 하는 정치인의 내면의 목적까지 처벌해서는 안 된다. 본인이 당선되거나 상대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한 의도가 명백하게 겉으로 드러난 활동만을 처벌 대상으로 해야 한다. 둘째, 겉으로 드러난 활동이 선거운동에 해당하는지는 수사기관이 아닌 유권자들의 눈으로 판단해야 한다. 유권자들한테 ‘나를 찍어달라’거나, ‘누구를 찍지 말라’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했을 경우에만 선거운동으로 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 검찰이나 경찰이 자의적으로 선거운동 여부를 판단하게 되면 권력의 의도가 개입된 수사로 대의민주주의가 왜곡될 수 있다. 이런 기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정치 신인들은 앞으로 출판기념회나 단체 또는 포럼을 만들어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는 행위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대해 김용덕, 박상옥, 이기택 대법관은 ‘다수의견이 기존 판례에 따라 엄격하게 지켜지던 사전선거운동을 대폭 허용함으로써 선거를 혼탁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며 반대의견을 냈다. 하지만 다른 대법관들의 지지를 확보하지는 못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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