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10.04 09:02
수정 : 2016.10.05 10:13
밥&법 대법 ‘한 죽음, 두 판결’
1949년 대구 민간인 희생사건
1·2심 손배소 이겼는데
대법에선 모순된 판결
아내 손배소 맡은 대법2부
2010년 진실위 결정서를 인정
배상청구 시효도 진실위 결정서 시점으로
아들 손배소 맡은 대법3부
진실위 ‘첨부자료’에 있다며 인정 안해
“청구시효 이미 끝났다”며 파기환송
아내 승소 확정 1년5개월 뒤 열린
아들 재판선 이례적으로 인용 안돼
김용덕 대법관은 두 판결 모두 참여
1949년 5월 경북 칠곡군에 사는 정재식(당시 27살)씨가 경찰에 끌려갔다. 며칠 뒤 정씨는 이웃 마을 골짜기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정씨 아들(68)은 2011년 4월 법원에 “아버지가 경찰에게 재판도 없이 학살당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1년 뒤 정씨 어머니 이아무개(87)씨도 “남편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다”며 같은 내용의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두 사건을 놓고 달리 판단했다. 어머니는 일부 승소했으나 아들은 패소했다. 아들과 엄마가 각각 원고 자격으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소송의 원인이 된 피해 당사자가 각각 아버지와 남편으로 같은 사람인데도 다른 결과가 나온 것이다. 한 아버지의 두 죽음, 대법원은 왜 그렇게 판단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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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1일 ‘대구 10월 사건’의 희생자 주검.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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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결 쟁점 정씨와 어머니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의 ‘대구 10월 사건 관련 민간인 희생 사건 진실규명 결정서’를 아버지와 남편의 피살을 입증하는 유력 증거라며 법원에 제시했다. 앞서 진실화해위원회는 2010년 3월 “대구·칠곡·영천·경주 등 4곳의 주민 59명이 1946년 10월부터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 사이 경찰과 군인 등에 재판 없이 사살됐다”고 결정했다. 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 이후부터 한국전쟁 사이 대구·칠곡·경주 등 3곳의 주민 46명이 대구 10월 사건과 관련해 경찰 등에 끌려가 사살됐다고 확인했다. 정씨 아버지는 그 46명 가운데 1명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정씨 아버지가 1949년 5월 경찰에 끌려가 칠곡군의 골짜기에서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다고 밝혔다. 4·19 혁명 뒤 1960년 꾸려진 4대 국회 양민피살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발간한 진상조사보고서가 주요한 근거였다. 이 보고서엔 1960년 6월24일 칠곡군수가 민의원(국회) 양민피살사건 조사위원회에 보낸 피살자 명단이 있는데 정씨 아버지의 이름과 직업, 주소 등이 적혀 있었다.
아들 정씨와 어머니의 사건을 맡은 1심과 2심은 모두 정씨 아버지가 피해자임을 인정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서를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엇갈렸다. 정씨 어머니의 재판을 담당한 대법원 2부는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서를 인정해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아들 정씨의 재판을 담당한 대법원 3부는 원심(2심) 판결이 틀렸다며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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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2일 오전 수천명의 시민이 식량 공출과 경찰의 시위대 사살 등에 항의하며 대구경찰서(현 대구 중부경찰서)로 향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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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3부는 정씨 유족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상규명을 요청하지 않아서 진실화해위원회가 직접 조사를 하지 않았다고 파기환송의 이유를 밝혔다. 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 뒤부터 한국전쟁 사이에 발생한 대구 6월 사건 희생자는 진실화해위원회 결정서 본문에 포함되지 않고 ‘첨부자료’에 기록됐기 때문에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다시 재판을 연 부산고법은 대법원 3부의 파기환송 취지를 받아들여 아들 정씨의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했다.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기간인 소멸시효에 대한 판단도 엇갈렸다. 통상적으로 손해배상의 소멸시효는 길게는 5년인데 정씨 아버지가 학살당한 1949년 5월을 기준으로 하면 유족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 아들은 2011년 4월, 어머니 이씨는 2012년 5월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1심과 2심, 어머니 재판을 맡은 대법원 2부는 국가적 혼란기에 경찰과 군인이 저지른 위법행위는 외부와 유족이 알기 어렵고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와 결정이 있기 전까지 국가가 대구 10월 사건을 조사한 적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소멸시효가 끝나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국가의 잘못이 더 크기 때문에 소멸시효는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이 나온 2010년 3월부터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아들의 재판을 맡은 대법원 3부와 파기환송심은 소멸시효가 끝났다고 판결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서가 효력이 없을뿐더러 국가가 소멸시효를 연장할 만큼 잘못하지 않았다는 논리다.
상급심에서 손해배상액이 대폭 깎인 것도 눈에 띈다. 1심은 “국가는 정씨한테 2억6500만원, 정씨 어머니한테 3억3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으나 2심은 “정씨한테 5000만원, 정씨 어머니한테 88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정씨는 5분의 4가량, 정씨 어머니는 4분의 3가량이 깎였다.
유족의 소송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민심의 변영철 변호사는 “손해배상액이 너무 깎여서 2심 재판부에 이유를 물었더니 대법원에서 상한액을 정해서 그렇다고 했다. 억울하게 재판 없이 국가기관에 사살됐는데 교통사고 사망 피해자의 보상금보다 적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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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2일 대구 태평로에서 경찰이 진압작전을 펼치고 있다. 경찰의 발포로 시위에 나선 시민들이 왼쪽 도로가에 웅크리고 있다. 쓰러진 주검도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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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헷갈리는 판결 기준 유사하거나 동일한 사건의 앞선 판결이 확정되면 뒤에 진행되는 재판에도 효력을 미친다. 이를 기판력이라 한다. 하지만 대법원 2부가 정씨 아버지의 피살을 인정하고 정씨 어머니의 손해배상을 먼저 확정했는데도 아들 정씨 사건을 담당한 대법원 3부는 2부의 결정과는 다르게 판결했다. 결국 파기환송심도 “소송물이 다르다”며 아들 정씨의 손해배상청구를 기각했다. 소송 주체가 달라서 동일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법원 3부가 “진실화해위원회 결정서에 포함되지 않고 ‘첨부자료’에 기록됐으므로 원고의 아버지를 희생자로 인정할 수 없다”며 정씨의 청구를 기각한 것은 다른 사건에 견줘봐도 일관성을 잃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실제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서 첨부자료에 정씨 아버지와 함께 피살자로 거명된 박아무개(당시 30살)씨 등 5명의 유족은 지난해 5월 대법원에서 일부 승소해 국가 배상이 확정됐다.
같은 사건인데 대법원에서 재판부가 둘로 갈린 것도 좀처럼 보기 드물다. 1심과 2심에선 재판부가 날짜가 다르게 접수된 정씨 모자의 소송을 같이 다뤄 같은 날 판결했지만 대법원은 일주일 간격으로 접수된 두 사건을 2부와 3부에 각각 배당했다.
더구나 김용덕 대법관은 정씨 어머니 상고심 재판관 4명 가운데 1명이었고 1년5개월 뒤 열린 정씨 상고심에선 주심을 맡았는데도 다른 판결을 내놨다. 한 변호사는 “같은 사건이고 같은 증거인데 대법원의 판결이 다른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대법원의 해당 사건에 대한 기준이 바뀐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 관계자는 “상고심은 원고와 피고가 출석을 하지 않기 때문에 사건번호가 다르면 재판부가 다를 수가 있다. 정씨 모자의 판결이 다르게 나온 것은 상고를 제기한 국가가 정씨 어머니에 대해서는 소극적으로, 정씨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부산/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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