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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0.25 05:01 수정 : 2016.10.25 10:30

[밥&법] 법 앞에 선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베트남 중남부 빈딘성 떠이선현 떠이빈사에 세워진 ‘빈안 학살사건’(1966년) 추모비의 모자이크 그림.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학살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구수정씨 제공
구수정(50)씨가 경찰의 전화를 받은 건 지난 7월이었다.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사건으로 고소됐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지난 8월23일 출석해 3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다.

“조사관이 이 문제를 잘 모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내가 질문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해서 답하기가 힘들 정도였으니까요. 하기야, 역사적 사실의 전모를 알아야 수사를 할 수 있을 텐데 누군들 쉽겠어요.” 그는 “사실관계 확인보다는 ‘고소인이 당신 주장이 허위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서 당혹스러웠다”고 했다.

구씨는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공정여행과 공정무역을 하는 사회적 기업 ‘아맙’의 본부장이자 지난 9월 출범한 ‘한국-베트남평화재단’(한-베평화재단)의 이사다. 직업이나 직함은 앞으로도 바뀔 수 있지만, 베트남 유학중이던 1999년에 한국군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사건을 <한겨레21>을 통해 한국에 최초로 알린 사실은 결코 바뀔 수 없다. 논문 발표와 구술 채록, 언론 인터뷰 등 진실을 발굴하고 알리는 일에 매달리다 보니 어느덧 17년이 지났고, 예고 없이 ‘법’과 맞닥뜨렸다. 그 만남은 썩 흔쾌하지 않았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사과하고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상징물인 ‘베트남 피에타’(왼쪽).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이다. 이 조각상은 아기를 안고 자장가를 부르는 엄마의 형상인데, 주한 일본대사관 맞은편 ‘평화의 소녀상’(오른쪽)을 제작한 김서경(51)·김운성(52) 부부 작가의 작품이다. 올해 안에 베트남 민간인 학살 지역과 국내에 설치될 예정이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장의성(72)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참전자회) 복지부장이 검찰의 연락을 받은 건 지난 5월이었다. 4월27일 한-베평화재단 건립추진위원회 발족과 ‘베트남 피에타상’ 공개 직후, 참전자회는 ‘구수정 등 음해세력 대응 및 대책’을 논의하는 시·도지부장 간담회를 잇따라 열었다. 이들은 대통령과 국무총리, 국방부, 외교부 등에 대응을 요구했다. 얼마 뒤 검찰에서 이들에게 고소 의향이 있는지 물어왔다. 장씨는 고소인 831명의 대표를 맡았다. “저쪽이 허위사실을 떠들어대도 우린 인터넷도 못하고, 세월을 참고 지나왔는데 하는 짓이 갈수록 태산이잖아. 일본이 한 짓이 있으니 아베가 소녀상 때문에 고초를 겪는 거야 그럴 만하다지만, 우리가 무슨 성폭행을 했다고 피에타상이야?” 그는 “임의단체 시절엔 생각도 못하다가 3년 전에 공법단체가 돼서 이렇게 소송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이참에 그런 짓 다시는 못하게 만들겠다”고 했다. 17년 전 처음 구씨의 보도를 접한 그도 마침내 법을 만났고, 이렇듯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월남전 참전자회
민간인 학살·성폭행 없었다며
한-베 평화재단 구수정씨 고소

현지조사로 확인된 학살
변호사들, 사과·배상 특별법 모색
“고소는 오히려 잘된 일
국가책임 인정하는 계기로”

참전자회는 구씨가 지난 2014년 일본 <주간문춘>과 한 인터뷰 기사와 베트남 평화순례 때 발언을 담은 동영상, 올해 <한겨레>와 한 인터뷰 기사 등이 허위사실을 적시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제출한 자료에는 1999년 이후 구씨의 행적과 관련해 웬만한 것들이 다 들어 있었다. 구씨는 “조사관이 <주간문춘> 인터뷰에 대해 가장 길게 물어보더라”고 했다. 이 인터뷰에는 한국군의 베트남 여성 성폭행에 관한 언급이 한 차례 나온다. 참전자회가 이 인터뷰부터 문제 삼은 것과 장씨가 ‘아베’ ‘성폭행’ ‘피에타상’을 두서없이 언급한 것은 징후적으로 겹친다.

한국은 위안부 외면한 일본과 다를까

올해는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하나의 담론 안으로 들어온 해다. 지난해 12월28일 한-일 ‘위안부’ 관련 합의가 촉매 구실을 했다. 철거 논란에 휩싸인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부부 작가가 베트남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사과하기 위해 만든 ‘베트남 피에타상’은, 우리의 근·현대사가 일방적인 피해자로 기술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베트남에 대해 가해자였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꼬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역설적 현실이 드러난 것이다.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의 핵심은 피고소인이 공표한 내용의 진위다. 참전자회가 구씨의 주장이 허위임을 입증하는 증거로 제출한 것은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 없었다’는 국방부 쪽의 답변서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는 처음부터 이런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해왔다. 피해를 주장하는 쪽의 증언을 청취하거나 현지조사를 벌인 적은 한 번도 없다. 한국 정부의 이런 태도는 일본 아베 정부가 “입증 자료가 없다”며 위안부 강제동원을 일관되게 부인하는 논리를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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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구씨의 주장은 베트남 현지인들에 대한 수많은 인터뷰와 베트남 당국의 여러 조사자료, 한국군 주둔지에 들어선 60개 안팎의 희생자 위령비와 아직 3개가 남아 있는 ‘한국군 증오비’로 뒷받침된다. 지금까지 구씨가 정리한 각종 공식자료만 33건에 이르고, 이 가운데는 1968~1970년 주베트남 미군사령부 감찰부 조사보고서 등 미국 쪽 자료들도 포함돼 있다.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희생자는 9천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 증언도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참전자 단체들은 이 모든 것을 허위, 날조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자신들이 “전우”라고 부르는 일부 참전 군인들의 학살 증언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참전자 단체는 지난해 4월7일 서울 조계사에서 열릴 예정이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 초청 행사를 막았다. 이들은 피해자들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민간인으로 위장한 베트콩”으로 단정했다. 이들에게 베트콩은 마땅히 죽여야 할 적이었다. 성폭력은 전혀 없었고, 여성 희생자의 젖가슴을 도려낸 건 베트콩이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베트남 꽝남성 퐁니·퐁넛 마을에 세워진 베트남전 희생자 위령비. 2014년 2월 현지 주민이 기자에게 위령비를 가리키며 연혁을 설명하고 있다. 위령비에는 민간인 희생자 7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임재성(36) 변호사는 법조인이 되기 전에 먼저 법과 만났다. 그는 병역거부자로 재판을 받고 실형을 산 뒤 변호사가 됐다. 2000년대에 대학을 다닌 그에게 베트남전쟁은 1948년 제주, 1980년 광주와 마찬가지로 기억해야 할 국가폭력의 현장이었고, 병역거부의 이유이기도 했다. 그가 속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아시아인권팀은 지난해 7월 베트남에 다녀온 뒤 올해 초 민변에 ‘베트남전쟁 연구모임’을 꾸렸다. 그는 간사 역할을 하면서 구씨와 알게 됐고, 한-베평화재단 이사로도 참여하게 되었다. 지난 7월, 법과 처음 대면한 구씨한테서 연락을 받았다.

베트남전쟁 연구모임은 한국군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이라는 사실 자체는 널리 알려졌는데도, 공식적 조사와 사과, 배상 등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에 문제의식을 갖고 시작됐다. 이 문제를 법률적으로 검토한 뒤, 베트남 피해자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하는 국가배상 소송과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 활동을 벌여나가자는 구상에 이르렀다. “그러려면 민간인 학살을 사법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먼저 이뤄져야 하는데, 작업이 방대해서 마땅한 계기를 잡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임 변호사는 “그런데 참전자 단체 쪽에서 이렇게 계기를 마련해줬다”고 말했다.

장완익, 김남주, 박진석, 임재성 변호사 등이 먼저 변호인단을 꾸려 선임계를 제출했다. 추가로 변호인을 모아 10명의 진용을 갖췄다. 변호인단은 곧 경찰에 온갖 문헌 기록과 인터뷰 기록 등을 담은 의견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들은 베트남 정부의 공식 조사자료를 번역하고, 내년에는 베트남 현지조사도 벌일 예정이다. 이렇게 확보한 자료를 토대로 법률적인 사실관계를 특정하는 일도 해야 한다. 어느 것 하나 쉽거나 소홀히 할 수 없다. 임 변호사는 “첫 단추는 학살이 있었는지를 확실히 입증하는 것이지만, 특별법 제정과 국가배상 소송까지 멀리 내다보고 준비하려고 한다”며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크게 높아져 앞으로의 활동에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구수정씨는 요즘 한국인 학생들과 베트남을 일주하는 평화답사를 하고 있다. 한달 넘게 이어지는 고난의 행군이다. “그동안 피해자 증언 등을 통해 한국군의 행적을 알리는 일을 해왔지만, 법정으로 가게 되면 당시 한국군의 동선 등과 일일이 대조하는 퍼즐 맞추기 작업이 필요합니다. 나로서는 새로운 계기가 될 겁니다. 비록 고소를 당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잘된 일 같아요.”

베트남 정부는 그동안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를 공식화한 적이 없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을 정식 군대가 아닌 미군의 용병으로 봐온 역사 인식과 닿아 있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도 한국은 베트남 투자 1위 국가다. 그러나 올 들어 베트남에서는 유력 언론들이 이 문제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등 여태까지와는 다른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위안부 문제가 비로소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은 25년이 지나도록 위안부 강제동원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사법적인 절차도 없었다. 피해자들은 이제 한국 정부로부터도 배제되고 있다. 한국 사회가 베트남에 대한 가해자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지 않는 한 베트남의 피해자뿐 아니라 한국의 피해자들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고통의 굴레 안에는 베트남에서 목숨을 잃은 5천여명과 부상자 1만여명, 고엽제 후유증 환자 2만여명도 포함돼 있다. 법은 지금 역사의 시험대로 들어서는 작은 입구에 서 있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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