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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1.17 09:20 수정 : 2017.01.17 09:25

경남 합천에 사는 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원들은 매주 수요일 ‘한국 원폭2세 환우 생활쉼터’에 모여 함께 식사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밥&법] 한 문장이 바꾼 세상
‘경상남도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 조례’
피해자 범위에 2세와 3세 등 후손도 포함

경남 합천에 사는 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원들은 매주 수요일 ‘한국 원폭2세 환우 생활쉼터’에 모여 함께 식사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한 문장이 바꾼 세상

“이 조례에서 ‘원자폭탄 피해자’란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피해를 입은 사람으로서(그 피해자 후손인 2세와 3세를 포함한다) …”

-‘경상남도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 조례’ 제2조(정의), 2012년 1월12일 제정

남편 정영현(48)씨가 “커피도 맛있고, 토끼 그림 그리기도 재밌어요”라며 ‘한국 원폭2세 환우 생활쉼터’를 설명했다.

“난 커피보다 빼빼로 과자가 더 좋아.”

옆에 있던 부인 허진영(48)씨가 남편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그러자 정씨는 “가만있어 봐. 내가 말할 거야”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무척이나 어눌한 말투 때문에, 몇번을 다시 묻고 들어도 이들의 말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웃어가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린이보다 순수하고 금실 좋은 부부였다.

이 부부는 지난해 여름부터 경남 합천군 ‘한국 원폭2세 환우 생활쉼터’에서 생활하고 있다. 두 사람의 부모들은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에 피폭된 원폭피해자이다. 1969년생 동갑인 정씨와 허씨는 유전성 질환인 다운증후군을 갖고 태어났다. 부모로부터 원자폭탄 피폭 후유증이 대물림된 것으로 추정된다.

쉼터를 운영하는 한정순(58) 한국원폭2세환우회 명예회장은 16일 “온갖 선천성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우리 존재 자체가 명확한 증거인데, 원자폭탄 피폭 후유증이 후손에게 대물림된다는 것을 증명할 의학적 증거가 없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라며 가슴을 쳤다.

일본 내무성 경보국이 1945년 말 작성한 자료를 보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터졌을 때 한국인 피폭자 10만명 가운데 5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해방 직후 4만3000명이 한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와 대한적십자사는 지난해 말 현재 국내 생존 원폭 피폭자를 2490여명으로 파악한다.

원자폭탄이 터지고 70여년이 흐른 지금, 원폭 피폭자 문제보다 원자폭탄 피폭 후유증을 물려받아 온갖 선천성 장애와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피폭자 후손 문제가 더욱 심각한 상태이다. 한국과 일본 정부는 비록 부족하지만 원폭 피폭자에게 의료·생계 지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원자폭탄 피폭 후유증의 대물림이 의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며 후손들의 고통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당연히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는다.

우리 정부는 원폭 피폭자 후손들의 실태는커녕 숫자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5월19일 제정된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도 1945년 원자폭탄이 투하된 때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 있었던 사람과 ‘당시에 임신 중 태아’로 피해자 범위를 한정하고 있다. 그러나 원폭 피폭자 자녀 중 선천성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힌 이들 모임인 ‘한국원폭2세환우회’의 회원은 이미 1300여명에 이른다.

이 때문에 경남도는 김두관 지사 시절이던 2012년 1월 ‘경상남도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 조례’를 만들며 피해자 범위에 ‘2세와 3세 등 후손’을 포함시켰다. 원폭 피폭자 후손을 원폭 피해자에 공식적으로 포함시킨 것은 한국은 물론 일본 등 전세계에서 처음이었다. 경남도가 이 조례를 만든 것은 원폭 피폭자들이 많이 살아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리는 합천군을 중심으로 경남에 우리나라 원폭 피해자의 30%가량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경남도 조례는 원폭 피해자 지원을 위한 종합시책 마련과 추진, 정기적 실태조사 실시, 원폭 피해자 복지·건강의 체계적 지원계획 수립·시행 등을 도지사 책무로 정하고 있다. 도지사는 원폭피해자 복지지원센터도 설치·운영할 수 있다.

조례에 따라 2013년 경남도가 경남도내 원폭 피해자 자녀 244명의 건강상태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13.9%(34명)가 선천성 기형이나 유전성 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장애인 등록률은 9.1%로, 전국 평균(5.0%)의 2배에 가까웠다.

경남도는 올해 2000만원을 들여 합천지역 원폭 피해자 피해진술을 받고 있다. 피해진술서에는 일본에 간 이유, 일본에서 했던 일, 피폭 당시 상황,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 귀국 이후 삶의 고충, 피폭 이후 건강상태, 후손들의 건강상태 등을 적도록 되어 있다. 경남도와 합천군은 국비 15억원, 도비 3억원, 군비 3억원 등 21억원을 들여 ‘합천 원자폭탄 피해자료관’을 짓고 있는데, 오는 8월 자료관이 완공되면 이곳에 피해진술서를 보관·전시할 계획이다.

그러나 법적 뒷받침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조례만으로는 원폭 피폭자 후손을 지원하는 데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지고 정확히 71년 만인 지난해 8월6일 ‘한국 원폭2세 환우 생활쉼터’가 합천군에 문을 열었다. 현재는 정영현·허진영 부부가 살고 있는데, 최대 6명이 동시에 생활할 수 있다. 매주 수요일엔 회원들이 모여 함께 식사하며 정보를 교환하는 등 소통한다. 지자체 지원을 받아 심리치료상담도 한다. 하지만 정부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시설은 한국원폭2세환우회와 시민단체 합천평화의집 등 전액 민간 후원금으로 운영하고 있다. 운영을 책임진 한정순 한국원폭2세환우회 명예회장은 돈 한 푼 받지 않고 자원봉사를 한다.

안재은 합천평화의집 팀장은 “현재는 곶감 빼먹듯 후원금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나마 올 연말이면 바닥날 것으로 예상한다. 하루하루 버티고 있지만 항상 불안하다”고 말했다. 심진태(75)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은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을 당장 개정해야 한다. 이제 2500명도 남지 않았고, 고령이나 몇 년 지나면 대부분 숨질 가능성이 높은 원폭 피해자 1세만을 위한 법으로는 원폭 피해자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글·사진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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