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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2.21 10:20 수정 : 2017.02.21 10:32

[밥&법] 부석사 불상, 반환과 환수 사이

지난 2일 충남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도비산 자락.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 올라가니 아담한 부석사가 눈에 들어왔다. 절 입구에 ‘고려 민초들의 간절한 염원, 신앙의 결정체, 금동관세음보살’이라고 적힌 세움간판이 있었다. 만약 관세음보살좌상이 계속 부석사에 남아 있었다면 자리했을 극락전 안에는 도금된 삼존불이 놓여 있었다. 극락전 한쪽 벽에는 관세음보살좌상에 관을 씌워놓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극락전 앞에서 만난 한 신도는 “법원 판결로 보살님이 곧 돌아올 줄 알았는데, 그 길이 다시 막혔다니 심란하다”고 말했다. 부석사 신도들에게 관세음보살좌상은 그저 ‘문화재’가 아닌 듯했다.

지난 2일 충남 서산 부석사의 모습. 관세음보살좌상의 부석사 환수를 주장하는 내용의 세움간판이 눈에 띈다. 최예린 기자
서산 부석사는 극락전 보수 과정에서 나온 상량기를 토대로 의상대사가 677년 창건하고 조선 초기 무학 스님이 중창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서산 부석사와 금동관세음보살과의 관계가 적힌 기록은 뜻밖의 장소에서 나왔다. 1951년 5월 일본 쓰시마(대마도) 관음사의 안도 주지는 관세음보살좌상을 들어 올리다가 불상 안 복장물(불상을 만들면서 속에 넣는 사리나 불경 등 부장품)을 발견했다. 복장물 중에는 불상의 기원을 적어놓은 결연문도 있었다. 결연문에는 천력 3년(1330년) 2월 불상을 만들어 고려 서주 부석사에 모셨다는 내용이 시주자 32명의 이름과 함께 적혀 있었다. 서주는 서산의 옛 명칭이다. 관음사의 안내문에도 관세음보살좌상이 고려시대 말기에 만들어진 고려 불상이라고 적혀 있다. 관음사에선 1526년에 불상이 봉안됐다.

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
고려 불교미술의 수작

2012년 쓰미마 관음사서
한국인이 훔쳐 거져와
일 관음사 “돌려달라” 요구
부석사 “왜구가 약탈한 것
우리에게 본래 소유권 있다”

1심 법원 “부석사에 주라” 판결
전문가 일부 “약탈 증거 없어
국제법 따라 훔친 건 돌려줘야”

관음사에 봉안돼 있던 서산 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 안에서 발견된 불상의 조성 내력을 밝힌 결연문. 김현구 전 서산문화원장 제공

관세음보살좌상 안에서 발견된 복장물 모습. 김현구 전 서산문화원장 제공

■ 쓰시마에서 대전으로…불상 반환 환수 논쟁 시작

관세음보살좌상

약 700년 전 부석사에 있던 이 불상이 분명치 않은 이유로 일본으로 갔다 약 500년 만에 국내로 돌아왔다. 2013년 1월29일 오후. 기자회견이 열린 대전지방경찰청 브리핑룸 한쪽에 불상 2점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 불상은 절도범들이 일본 쓰시마에서 훔쳐왔다. 둘 중 크기가 작은 동조여래입상은 38.2㎝ 높이에 몸매가 드러나는 얇고 선이 굵은 가사를 입고 있었다. 높이 50.5㎝의 관세음보살좌상은 머리 관이 없는 상태로 오른손을 비스듬히 들고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당시 기자회견장에 온 문화재청 관계자는 “동조여래입상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것이고, 관세음보살좌상은 14세기 고려시대 것이다. 이 불상들은 국내 학계에서 고대·중세 불교미술의 수작으로 평가해왔다. 1974년 일본에서 동조여래입상의 가치를 1억엔으로 평가한 점을 생각하면 현재 시가로는 수백억원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관세음보살좌상은 국내 학계에서는 ‘서산 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이라고 부른다. 불상 안에서 나온 복장물에서 ‘천력 3년(1330년) 고려 서주 부석사’라는 명문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자리를 뜨려는 문화재청 관계자를 붙잡고 물었다. “절도범이 훔쳐온 것이지만, 애초 우리 문화재인데…. 불상을 돌려줄 수밖에 없나?” 문화재청 관계자의 답변은 단호했다. “국제법에 따라 훔친 문화재는 돌려줘야 한다. 어쩔 수 없다.” 1970년 유네스코 총회가 채택한 ‘문화재 불법 반출입 등에 대한 협약’은 ‘불법 반출된 문화재는 본래 소장처가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돼 있다. 당시 브리핑룸에 있던 몇몇 기자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절도범 손에 돌아온 고려 불상 반환’ 논란의 시작이었다.

■ 500년 만에 절도범 손에 돌아온 고려 불상…법정 공방

2012년 10월3일 김아무개(74)씨 등은 쓰시마에 도착했다. 3일 뒤 이들은 쓰시마의 가이진 신사에 있던 동조여래입상과 관음사에 있던 관세음보살좌상, 이즈하라마치 신사에 보관 중이던 대장경 1점을 훔쳤다. 훔친 문화재는 운반책에게 넘겨졌다. 운반책들은 출국자 엑스선 검색대가 없는 후쿠오카현의 하카타항으로 이동한 뒤 10월8일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했다.

도난 사실을 확인한 일본 사찰 쪽의 신고로 경찰 수사가 시작됐다. 절도범의 덜미는 생각보다 쉽게 잡혔다. 일본의 중요문화재를 훔쳤으면 경찰 수사망을 피해 상당 기간 숨어 지내야 하는데 절도범들이 범행 직후부터 불상을 팔아보려 여기저기 흥정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전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문화재 불법 유통 경로를 조사하다가 불상 절도단의 흔적을 발견했고, 2012년 12월22일 일당을 체포했다. 경찰은 절도단이 경남 마산의 한 창고에 숨겨뒀던 불상도 압수해 가져왔다. 이렇게 쓰시마에 있던 불상은 대전까지 오게 됐다.

‘500년 만에 돌아온 불상의 거취’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1330년 관세음보살좌상이 만들어졌다고 복장 기록에 나온 충남 서산 부석사가 ‘불상의 일본행’에 제동을 걸었다. 부석사의 주지인 원우 스님은 “교류 등 정상적인 방법으로 불상을 일본에 넘겨줬다면 불상 안에 있는 복장물을 비우고 주는 것이 맞다. 불상 안에서 복장물이 그대로 발견됐다는 것은 불상이 약탈됐다는 중요한 증거”라며 “관세음보살좌상이 본래 있던 서산 부석사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석사 신도와 서산 주민들이 ‘관세음보살좌상 제자리 봉안위원회’를 만들어 불상 환수 운동을 시작했다.

2013년 2월 대전지법은 부석사가 낸 반환 중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법원이 정한 불상의 반환 유예 가처분 기간이 지난해 2월로 끝나자 쓰시마의 관음사는 한국 법무부와 외교부, 문화재청에 조기 반환 절차를 진행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맞서 부석사는 지난해 3월 대전지법에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관세음보살좌상 인도 청구소송’을 냈다. 지난달 26일 대전지법 민사12부는 “정부는 이 불상을 부석사에 인도하라. 가집행도 허용한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검찰은 항소했고, 5일 뒤 대전지법은 불상 인도 가집행을 막아달라는 검찰의 신청을 받아들였다. 여전히 관세음보살좌상은 대전 유성구의 국립문화재연구소 유물수장고에서 5년째 긴 겨울잠을 자고 있다. 절도범이 훔친 2점의 불상 중 동조여래입상은 ‘불법 유출 증거가 없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도 없어 도난 당시 점유자인 일본 신사에 전달한다’는 대검의 결정에 따라 일본으로 돌아갔다.

■ 약탈 문화재냐 장물이냐?…불상 반환 논쟁 2라운드

부석사 극락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넓은 간척지가 도비산 바로 밑부터 펼쳐져 있다. 간척 전에는 부석사가 있는 도비산 바로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일본에서 배를 타고 온 왜구가 노략질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왜구가 불상을 약탈해 갔느냐’를 따질 때 부석사가 있는 서산 지역에서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했는지는 불상 인도 소송의 쟁점 중 하나였다. 1330년 부석사에 불상이 봉안됐고, <고려사>에는 1352년, 1375년, 1378년, 1380년, 1381년에 왜구가 서산 지역을 침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난 2일 서산 부석사 극락전의 모습. 만약 관세음보살좌상이 계속 부석사에 있었다면 머물렀을 곳이다. 최예린 기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해 행정상 서산에 붙어 있던 태안을 다시 예산군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1926년 간행된 <서산군지>를 보면 부석사에서 약 2㎞ 떨어진 왜현리(지금의 창리)의 지명 유래를 설명하며 “왜구가 침입해 노략질할 때 우리 군이 이를 붙잡아 매달아놓은 데서 연유해 마을의 명칭을 지었다”고 나와 있다. 한 마을의 이름이 ‘왜구의 목을 매달았다’는 뜻일 만큼 서산 지역에서의 왜구 침략이 심했다는 것이 부석사의 주장이다. 하지만 불상 약탈의 심증은 있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약탈·반출이 이뤄졌는지 등 실증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법조계와 학계의 견해도 만만찮다. 구체적인 약탈 증거가 드러나지 않으면 부석사가 소유권을 주장해도 불상을 환수하기 어려울 것이란 주장이었다.

1926년 간행된 <서산군지>에 나온 부석면 왜현리(지금의 창리) 지명 유래에 대한 부분. 우리 군이 왜구을 붙잡아 매달아놓았다는 데서 왜현리라고 이름 붙였다는 내용이다. 서산문화원 제공
절도범이 일본에서 국내로 훔쳐온 불상을 ‘장물로 볼 것이냐 약탈 문화재로 볼 것이냐’를 놓고 그동안 여론이 엇갈렸다. 지난달 1심 재판부는 “이 불상은 서산 부석사의 소유로 넉넉히 추정할 수 있고, 과거에 증여나 매매 등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도난이나 약탈 등의 방법으로 일본의 관음사로 운반돼 봉안됐다고 봐야 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불상 안에 복장물이 그대로 들어 있던 점과 불상을 어떻게 옮기게 됐는지 적은 이안문이 없는 점을 판단의 근거로 삼았다. 불상의 호적등본에 해당하는 이안문이 없을 경우 불상이 비정상적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일본 학자의 글도 약탈 증거로 채택됐다. 기쿠타케 준이치 교수는 서일본문화협회가 발행한 <대마의 미술>(1978년)에 “관음사는 조선으로 건너가 악행을 저지른 고노씨가 귀국해 만들었다. 1330년 제작된 고려 불상이 존재하는 것은 왜구에 의한 일방적인 청구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고 기고했다. 보통 관세음보살좌상과 한 묶음인 보관과 대좌가 없는 점도 약탈의 근거라고 법원은 판단했다.

하지만 1심 판결 뒤에도 논란은 여전하다. 쓰시마로 건너간 한반도 불상에 대한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정영호 단국대 석좌교수는 “훔쳐 온 물건이기 때문에 반환하는 게 원칙이다. 부석사에서 약탈해 갔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도난품을 일본에 돌려주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국외 반출 우리 문화재 환수 운동을 펴온 혜문 스님(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도 이 문제를 ‘문화재 반환’의 관점이 아니라 ‘도난품 반환’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혜문 스님은 “단순 도난 사건인데 이 문제를 문화재 반환 문제로 착각해 상황이 꼬였다. 1심 재판은 부석사와 한국 정부가 벌인 것이지 일본 관음사와 재판한 것이 아니다. 한국 재판에서 부석사가 이겨도 일본은 결국 이 문제로 국제사법재판소까지 가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일본은 쓰시마시의회가 불상 반환 결의문을 채택했고 관방장관, 문부과학상 등이 한-일 장관회담 때 불상 반환 요청을 한 바 있다. 2심 재판에 일본이 참여할지는 불투명하다. 대전고검은 일본대사관을 통해 일본 정부와 관음사 쪽에 2심 참여 절차를 편지 형태로 전달해놓았다.

500년 만에 다시 대한해협을 건너왔다 길을 잃은 고려 불상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2심 재판은 3월께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불상 반환 논쟁 2라운드 공이 울린다.

대전/최예린 기자 floy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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