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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3.20 20:40 수정 : 2017.03.20 22:31

동네변호사가 간다

얼마 전 대학 후배가 자신이 사는 아파트의 이웃들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이 아파트는 난방이 중앙공급식인데다가 녹물이 나올 정도로 오래돼 개별난방으로 전환하는 공사를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공사주체인 입주자대표회의의 독선과 횡포가 도를 넘어, 이에 항의하고 공사 내용에 대한 설명을 요구해도 모르쇠로 일관한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입주자대표회의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입주민들에게 배포한 유인물을 입주자대표회의 쪽이 경비아저씨들을 동원해 수거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자 반대 쪽도 입주자대표회의가 배포한 유인물을 일부 수거했다. 이 일을 가지고 입주자대표회의가 반대 진영에 있는 입주민들을 절도, 재물손괴, 업무방해 등의 죄목으로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후배를 포함한 반대 쪽 주민들의 요구는 아주 단순했다. 내 집에 들어오는 보일러의 시공사를 어디로 하고, 그 가액의 산출을 어떻게 하며, 공사의 진행이 어떻게 되는지 설명을 듣고 질문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요구다. 그런데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기는커녕 형사고소까지 당하고 보니 매우 황당했다는 것이다. 후배는 분한 마음에 진한 눈물까지 쏟아냈다.

변호사로 일하면서 이런 사례들을 여기저기서 목격한다. 우리 사회는 합리적인 대화나 토론을 통하여 절차적으로 이견을 해소해가는 문화가 아직은 취약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을 보면, 박 전 대통령이나 김기춘, 우병우, 조윤선 등 정권 핵심들은 이견을 토론과 대화를 통하여 해소하기는커녕 이견의 존재 자체를 용납하지 않고 이를 ‘블랙리스트’나 검찰을 동원해 풀어내려고 했다.

이런 현상은 비단 국가권력 차원의 일만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서푼짜리 권력이 있는 자리나 단체면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상층의 정치권력만이 아니라 풀뿌리 생활 곳곳에서도 크든 작든 권력을 잡는 사람들이 이견의 존재를 도무지 용납하지 않으려 하는 문화가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

이 이견을 강압적으로 억누르려 할 때 흔히 선택하는 수단이 ‘법’이다. 상층의 정치권력이 정당해산, 내란음모 등의 법적 조치를 동원하듯, 풀뿌리 작은 권력들도 반대편에 대하여 형사고소, 민사 가처분 등 온갖 법적 조치를 동원한다. 가령 재개발, 재건축을 둘러싼 이해관계의 대립 양상은 그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대표자들의 독선과 횡포→이에 반발한 반대자들의 결집→형사고소로 반대자 탄압→반대자의 대표자에 대한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 등 법적 조치의 수순을 밟는다. 그렇게 하고는 이 과정을 법치주의라고 선전한다. 법치주의? 웃기는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그 본래의 뜻과 가장 멀어진 말 중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법치주의’를 꼽는다. 왜냐면 법치주의라는 말은 국민(입주민)이 법을 잘 지키라는 뜻이 아니라, 권력자(대표자)가 법을 잘 지켜 자신이 대표하는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를 잘 지키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법 위에 군림하면서 막상 그 법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던 박 전 대통령은 이제 권좌에서 축출됐다. 이번 박근혜 탄핵은 우리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 시민혁명이라 부를 수 있는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비단 정치권력 상층에만 머물지 말고 마치 봄바람이 겨울의 음습한 기운을 몰아내듯 골목과 골목, 동네와 동네에까지 스며들기를 바란다. 그래서 크든 작든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그 권력이 자신의 전속적인 것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임을 명심할 수 있게 되기 바란다. 그리하여 자신은 다양한 이견을 조정하고 중지를 모으는 봉사자의 지위에 있음을 공감하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고소나 가처분 같은 생경한 용어로 다른 사람을 제압하는 것이 법치가 아니라, 그런 이견을 슬기롭게 해소해가는 일련의 과정이 진정한 법치라는 점도 아울러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이광철/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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