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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3.27 20:28 수정 : 2017.03.28 08:32

[밥&법]국민에게 ‘본보기 소송’ 거는 정부
제주 해군기지 공사 늦어졌다며
삼성물산이 손해배상 청구하자
해군 “강정 주민 34억 물어내라”
대림물산도 손실보상 요구 중이고
삼성물산 2차로 130억 청구 진행

반대시위 참여한 정도따라
4단계로 분류해 액수 차별화
주민들 사이 갈등 부추겨

“일방적 국책사업에 분노해
지난 10년간 싸우다 범법자 되고
이미 벌금 맞았는데 구상금까지”

지난 25일 오전 미국 해군 이지스구축함 스테덤함이 서귀포 해상 범섬을 뒤로하고 서서히 제주해군기지로 들어왔다. 기지가 완공된 뒤 기항한 첫 외국 함정이다. 이 시간, 몇몇 주민과 활동가들은 해군기지 앞에서 ‘입항 반대’를 외쳤다. 강정포구에는 ‘해군기지 결사반대’, ‘구상권을 철회하라’는 빛바랜 노란 깃발이 바닷바람에 펄럭였다. 배를 타고 출어했던 주민들이 정오 즈음 생명평화센터 앞에 벼룩시장처럼 생선 좌판을 펼치자 동네가 부산해졌다.

지난 25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제주해군기지에 미 해군 이지스 구축함 스테덤함이 미 해군 함정으로는 처음으로 입항했다. 허호준 기자

지난해 2월 공사를 끝낸 제주해군기지 모습. 해군 제공
요즘 서귀포에는 목련이 이미 피었다 지고 있다. 길가 왕벚나무들은 이제 꽃망울을 맺었다. 4월 초가 되면 강정마을 길가에는 왕벚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날 것이다. 생명의 싹을 틔워내는 봄이 돌아왔지만, 강정마을 포구의 바닷바람은 여전히 차가워 사람들을 움츠러들게 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강정마을에는 봄이 와도 차가운 바람이 주민들의 가슴속을 후벼 파고들었다. 2007년 4월26일은 마을이 만들어진 지 450년이 넘는 강정마을 공동체가 붕괴하기 시작한 날이다. 마을주민 1900여명(유권자 1050명) 중 87명만 참석한 마을 임시총회에서 찬반 토론도 없이 후다닥 박수로 ‘제주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했다. 그 뒤 10년. 임시총회에 참석했던 주민들도 마을이 이렇게 쪼개질 줄은 까마득히 몰랐다. 궁핍했던 옛날에도 쌀과 물이 좋아 ‘제주에서 제일간다’는 뜻으로 ‘일강정’이라 불렸던 강정마을은 해군기지 유치 찬성과 반대 입장에 따라 주민들이 갈라졌다. 해군기지 건설 반대투쟁으로 ‘법 없이 살아가던’ 주민들은 범법자가 됐다.

해군기지 공사가 벌어지기 전인 2010년 11월의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 해안 모습. 허호준 기자
제주해군기지는 지난해 2월26일 완공됐다. 더 이상의 큰 충돌은 없을 듯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 상처와 갈등은 해결될 줄 알았다. 살아보겠다며 감귤과수원으로, 바다로, 노동현장으로 일하러 다니던 이들에게 이번에는 ‘공사가 늦어진 게 당신들 때문’이라며 거액의 ‘구상권 청구’ 소송장이 날아들었다.

■ 10년의 고통, 잠 못 이루는 강정주민들 “남편이 불면증에 시달려서 잠을 못 자. 법원에서 가압류 들어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10년 동안 싸우면서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봤는데 재산 피해까지 보면 어쩌겠어.” 정영희(68)씨의 말에는 걱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정씨는 나군, 남편 강성원(86)씨는 가군이다. 해군은 해군기지 반대 ‘가담 정도’에 따라 주민 등을 임의로 가~라군으로 분류해 구상금을 청구했다. 정씨는 “6~7년 전에 일어난 일로 그러는 모양인데, 그때 남편이 80살이었다. 그런 노인이 뭘 할 수 있었겠나. 평화센터 오가는 사람들한테 쉼터 내주고, 기자회견 하면 나간 죄밖에 없다”고 항변했다.

제주해군기지 터에 땅 1800여평이 수용된 문상철(55)씨는 해군기지 유치가 이뤄진 날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마을총회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그는 “만장일치로 손뼉 쳤다는데, 아니다. 주민 몇사람과 밖으로 나가 손뼉 치지 않았다”고 했다. 해군기지 반대투쟁 초기 벌금을 3차례나 맞은 문씨는 구상금 청구 대상이 아니지만 정부(해군)의 소송제기에 분노했다. 문씨는 “구상권 청구소송은 반대 주민을 갖고 노는 것이나 다름없다. 숨을 못 쉬게 하는 것이다”라며 “구상권이 철회되기 전에는 갈등이 풀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반대투쟁에 앞장서온 강동균 전 강정마을회장은 “과연 우리가 국가정책 추진에 무슨 잘못을 했는지 묻고 싶다. 아름다운 마을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10년 동안 싸운 죄밖에 없다. 왜 우리가 구상금까지 물어줘야 하느냐”고 분노했다. 조경철 강정마을회장은 “주민들한테 지난 10년은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시간이 해결해줄 줄 알았는데 해군이 이번에는 구상권을 들고 주민을 압박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구상권 청구소송은 해군기지 반대 주민 사이에서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다. 한 주민은 “소송 대상이 아닌 주민은 대책회의에 참석하는 것도 눈치 보여서 못 간다. 대상자들이 ‘너는 대상자가 아니니까’ 하고 무심코 던진 말이 상처가 되기도 한다. 정부와 해군이 반대하는 주민들끼리도 갈등하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구상권 소송 대상자인 주민은 “싸울 때는 같이 싸우고 공동으로 모여 아우성치고 했다. 그런데 일부는 구상권에 걸리지 않으면 ‘내 일이 아니다’라며 남의 일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서운함을 느낄 때도 있다”고 했다. 구상권 청구소송에서 나군으로 분류된 윤상효(80)씨는 “기가 막힌다. 구상권 청구소송으로 주민들끼리도 갈등이 생기고 있다. 대상자가 된 주민들 외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아 갈등이 생길 우려도 있다”고 말끝을 흐렸다.

이번 구상권 청구가 끝이 아니다. 항만 2공구를 담당했던 대림산업은 지난해 7월 손실비용에 대해 대한상사중재원에 중재 신청을 해 오는 6월 결과가 나올 전망이다. 1차로 273억원의 중재 판정을 받아낸 삼성물산도 2차로 130억원의 중재 요청을 해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10년 동안의 투쟁으로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주민들에게 현재 진행 중인 두 건의 중재 결과가 나오면 구상권 청구소송이 추가로 제기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주민들은 “지난 10년간 마을 공동체가 파괴되고 씻지 못할 상처를 입었다. 그런데도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해군기지 건설공사 지연 책임마저 떠넘기려 하고 있다. 구상권 청구행위는 만신창이가 된 마을 공동체를 다시 파괴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잠 못 이루는 강정마을 주민들. 10년 전의 마을로 돌아가 주민들이 웃음꽃을 피울 수는 없을까.

■ 구상권 청구소송 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해 2월 해군기지 준공식 때 “그동안의 갈등을 극복하고 지역사회와 상생하고 화합하는 뜻깊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축전을 보냈다. 그 후 1년 정부가 공언한 ‘갈등 극복’이나 ‘상생’, ‘화합’은 선언적 구호에 그쳤을 뿐이다.

“구상권 청구는 공사를 방해한 불법행위에 따른 손실을 보전하기 위한 절차입니다. 현재까지 이를 철회할 계획은 없습니다.” 지난 9일 제주해군기지 준공 1년을 맞아 기지에서 열린 현안설명회에서 해군본부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해군은 지난해 3월28일 서울중앙지법에 해군기지 공사 지연을 이유로 반대운동에 나섰던 주민과 활동가, 단체를 상대로 손해배상(구상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개인 116명(마을주민 38명)과 강정마을회 등 5개 단체에 요구한 금액만 34억4800만원이다. 해군은 공사가 지연된 기간(2011년 1월~2012년 2월)에 이들이 사업 터 무단침입 뒤 공사 현장 점거, 공사장 정문 봉쇄로 공사 차량 출입 저지, 해상으로 진입해 해상 작업 중인 선박을 방해했다며 주민 등을 가~라군으로 나눠 소송을 제기했다. 가군(개인 26명·5개 단체, 31억4800만원), 나군(32명, 2억원), 다군(32명, 9천만원), 라군(26명, 1천만원)에게 손해배상금을 물어내라는 것이다.

구상권 청구소송은 해군기지 항만 1공구 공사를 맡은 삼성물산이 2012년 11월 공사지연에 따른 손실비용으로 해군에 360억원을 청구하면서 시작됐다. 해군은 대한상사중재원의 중재 판정을 통해 2015년 8월 273억원(이자 포함)을 삼성물산에 물어줬다.(<한겨레> 2016년 10월8일 11면 정부-삼성, 제주기지 반대 맞서 “공개돼선 안 될 긴밀한 협조” 참조) 해군은 이 가운데 주민과 활동가, 단체들의 ‘불법행위’로 공사가 지연됐다며 34억4800만원의 구상금을 청구했다. 해군본부 관계자는 지난 23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천성산 터널공사 등 다른 지역에서 진행된 국책사업에서는 시공사가 손실비용을 청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상권 청구가 없었다. 제주해군기지 구상권 소송은 시공사가 ‘손실을 보았다’며 비용을 청구함에 따라 내려진 합법적인 조치다. 군으로서는 법적인 절차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해군이 낸 소장에는 주민들이나 활동가, 마을회 등의 행위를 특정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해군기지 정문 앞에 가보지도 않은 주민까지 구상권 청구 대상에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소송을 통해 국책사업 등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목소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거나 억압하는 선례가 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고권일 강정마을회 부회장은 “강정마을의 구상권 문제가 선례가 되면 앞으로 정부나 기업이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주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 주택가에 그려진 평화의 나무. 허호준 기자
■ 처벌받은 주민들 상처 덧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백신옥 변호사는 “사적 권리가 침해됐을 때 손해배상 청구를 하는 것이지 공적 법익이 침해됐을 때는 형벌로 충분하다. 주민들은 이미 처벌을 받았다”고 말했다. 지난 10년 동안 연인원 700여명이 연행됐고, 사법처리 건수만 480여건, 사법처리 대상에 오른 주민과 활동가들은 206명에 이른다. 개인이 내거나 마을회가 부담한 벌금만도 3억8천여만원이다. 지난해 무산되기는 했지만 벌금 납부 부담에 강정마을회관 매각을 논의했을 정도다.

강호진 제주주민자치연대 대표는 “국책사업을 시행하면서 주민의 동의와 협조를 제대로 구하지 않아 발생한 민원으로 공사가 진행되지 못했거나 추가 비용이 발생했다고 해도 원인 제공은 국가가 한 것 아니냐. 졸속적이며 민주적이지 못한 사업의 부당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다”라고 비판했다. 조경철 강정마을회장은 “정부가 아파 병원에 입원한 환자를 패대기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문제를 해소하지 않는 한 갈등은 해결될 수 없다”고 말했다.

“온 주민이 반대했는데 합리적 절차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국책사업을 진행하지 않았나. 정부와 해군이 강정마을 주민들을 무시하고 짓밟았기 때문에 반대하고 분노한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쓰러지고 상처받은데다 범법자가 되고 벌금·손해배상금까지 떠안게 된 강정마을 주민들은 묻는다. “이게 나라냐.” 제주/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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