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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9.12 07:43 수정 : 2017.09.17 16:16

밥&법 ‘임신중단 합법화’ 커지는 목소리

폴란드처럼…한국판 ‘검은 시위’
작년 복지부가 낙태 논란 불붙여
임신중절 의사 처벌 강화하려다
여성들 반발…전국으로 시위 확산
“내 신체와 인생, 선택할 권리 박탈”

여성 옭아매는 ‘낙태죄’
배우자 동의 없인 수술 못하는 등
법이 허용하는 사유 매우 제한적
남성이 여성을 협박하는데 악용도

“먹는 낙태약 도입하라”
흡입식 수술은 부작용 크고 위험
WHO도 “안전·합법적 임신중절은
여성이 가져야 할 근본적인 권리”

지난해 10월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를 위한 여성 검은 시위’에서 참가자들이 임신중절 수술을 한 의료인의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정부 입법예고를 규탄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여아낙태 권장하고 여성에게 책임전가/ 인구정책 수단으로 여성신체 사용 말라/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라!”

“내 자궁에 전세 냈냐/ 집주인이 싫다는데 세입자를 니가 받냐/ 내 자궁은 내 것이다/ 공공재가 아니다!”

지난달 13일 서울지하철 홍대입구역 8번 출구에서 가면과 마스크를 쓴 여성들이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임신중단’ 합법화를 주장하며 지난해 10월부터 시위를 해왔다. 이날 시위가 9번째였다. 그동안 이 시위에 참석한 인원은 1000여명에 이른다. 이들은 ‘태아를 떨어트린다’는 낙태 대신, 여성의 선택권을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임신중단’이라는 용어를 내세우고 있다. 의학용어인 ‘임신중절’보다 스스로 중단한다는 자기결정권의 의미가 더 부각된다는 점도 고려했다.

이들이 임신중단 합법화 요구에 뛰어든 건 지난해 9월부터다. 당시 보건복지부는 성폭력, 무허가 주사제 사용, 대리수술 등 8가지 유형의 ‘비도덕적 진료행위’를 한 의사의 자격정지 기간을 1개월에서 최대 12개월까지로 상향 조정하는 내용의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일부개정령(안)’을 입법예고했다. ‘비도덕적 진료행위’ 항목에 ‘모자보건법 제14조 제1항을 위반하여 임신중절 수술을 한 경우’가 포함된 게 논란을 일으켰다.

전국 여성들이 거리로 나섰다. 폴란드에서 여성들이 검은 옷을 입고 ‘낙태금지법 반대 시위’에 참가해 법안 철회를 이끌어낸 것처럼 한국 여성들도 낙태금지법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15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처음으로 시위가 열린 뒤 부산, 광주, 대구 등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됐다.

결국 복지부가 한발 뒤로 물러섰다. 지난해 12월 복지부는 불법 임신중절 수술을 한 의사에 대한 처분을 현행대로(1개월 자격정지) 유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성들은 시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임신중단’은 여전히 불법이기 때문이다.

태아 생명권 대 임신부 자기결정권 그동안 임신중단 합법화를 두고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대비하며 찬반 논란이 계속됐다.

자궁에 수정란이 착상한 뒤의 태아는 모두 생명권의 주체로 인정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은 낙태를 처벌하지 않거나 가벼운 제재만 가하면 낙태가 만연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이들은 유전적 질환 등 모자보건법에서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사유 이외에 사회적·경제적 사유로 인한 낙태까지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임신 초기(1~12주)와 중기(12~24주)의 태아는, 인간의 생명과 어느 정도 동일시할 수 있는 임신 24주 이후의 태아와는 달리 봐야 한다는 것이 임신중단 합법화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임신 초기의 경우 태아가 고통을 느끼는 신경생리학적 구조를 갖추지 않은데다 낙태 시술도 간단하고 부작용도 적은 만큼, 임신부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임신중단 합법화를 요구하는 여성 모임 ‘비웨이브’(BWAVE) 회원들은 “아이를 제대로 키울 사회적·경제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서 아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미성년 여성이나 다자녀 여성에게 무조건 아기를 낳으라고 강제하는 것이 그 여성과 태어날 아이들의 행복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생각해볼 문제”라며 “모자보건법에서 인정하는 임신중절 사유에 ‘사회·경제적 사유’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여성에게 자신의 신체와 자신의 인생에 대해 선택할 권리를 주지 않는 것은 여성을 인격체로 대하는 일이 아니다”라며 “자신의 몸을 희생시켜 임신과 출산을 하며 양육의 부담까지 전적으로 짊어지는 여성을 무시한 채,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를 국가 발전을 위한 동력으로 대하는 것은 생명존중이 아니라 여성인권 탄압”이라고 말했다.

현재 모자보건법은 △본인이나 배우자가 유전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본인이나 배우자가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된 경우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등을 임신중절 사유로 인정하고 있다.

남친의 협박 수단 된 낙태죄 낙태죄는 여성을 협박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20대 후반의 ㄱ씨는 지난해 7월 임신중절 수술을 받았다. 남자친구를 사랑했지만 아이를 낳을 수는 없었다. 남자친구는 술을 마시면 행패를 부리곤 했다. 욕을 하며 때리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수술 뒤 둘의 관계는 회복되는 듯했다. 남자친구는 술버릇을 고치고 다시 아이를 갖자고 했다. 둘은 결혼식도 올렸다. 하지만 혼인신고를 하기도 전에 남자친구의 나쁜 버릇은 다시 시작됐다. 둘은 결국 헤어졌다. 파혼은 간단치 않았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아 이혼 절차는 필요 없었지만, 결혼에 들어간 비용이 문제가 됐다. 비용 문제로 다투던 남자친구는 낙태죄를 들고나왔다. 그는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임신중절 수술을 받았다며 올해 초 ㄱ씨를 ‘낙태죄’로 고발했다. 현행 모자보건법은 배우자의 동의를 임신중절 수술의 필수요건으로 전제하고 있다. ㄱ씨는 결국 재판을 받게 됐다.

30대 초반인 ㄴ씨는 지난 4월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ㄴ씨에게 매달리던 남자친구는 돌연 협박하기 시작했다. “다시 만나주지 않으면 지난해 받은 임신중절 수술로 고발하겠다”고 했다. ㄴ씨는 임신 당시 유산의 위험이 있었던데다 남자친구도 반대하지 않아 수술을 결정했다. ㄴ씨는 “남자친구가 별 관심이 없어서 친구와 함께 (임신중절 수술을 하러) 병원에 갔을 정도다. 헤어지자고 했더니 협박을 할 줄은 몰랐다. 너무 고통스럽고 불안하다”며 한국여성민우회에 전화 상담을 요청해왔다.

여성민우회의 한 활동가는 “낙태죄로 협박받는 여성들의 상담 의뢰가 늘어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며 “낙태죄가 재산상 다툼이나 이혼 과정에서 협박의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은, 낙태죄가 본래의 취지와 달리 잘못 활용되는 현실을 방증한다”고 말했다.

여성 모임 ‘비웨이브’ 회원들이 지난 6월23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 걷고싶은거리에서 임신중단 합법화를 촉구하고 있다.
“먹는 낙태약 도입하라” 외치는 여성들 임신중단 합법화를 요구하는 여성들은 먹는 낙태약인 미프진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먹는 낙태약으로 알려진 미프진은 프랑스 제약회사에서 개발해 1988년 인공임신중지용 약물로 승인됐다. 미프진은 태아가 자궁 안에 있게 해주는 호르몬인 프로게스테론 생성을 억제해, 임신 유지를 어렵게 만든다. 미국에서는 의사 처방을 전제로 판매가 허용되고 있고, 유럽에서는 아일랜드와 폴란드를 제외한 나라들 대부분에서 미프진이 판매된다. 중국 정부는 1992년 자체 제약회사를 설립해 미프진 복제약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미프진은 수입금지 품목이다.

이들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행 중인 흡입식 낙태수술은 전신마취를 동반하며, 자궁내막증·자궁천공 등의 부작용을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 낙태 경험 여성의 20%가 직간접적인 후유증을 겪을 정도”라며 “미프진은 마취 및 수술이 필요 없으며, 하혈과 함께 자연 배출되어 장기가 손상될 우려가 적고 내원 치료를 계속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과 뉴질랜드, 영국, 이스라엘, 일본, 칠레, 핀란드 등 9개 나라를 제외한 25곳에서 임신부 본인의 요청에 따라 낙태가 가능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절을 여성이 가져야 할 ‘근본적인 권리’로 보고 있다.

낙태에 관한 입법례는 크게 두가지 방식으로 나뉠 수 있다. 첫번째 방식은 기한 방식이다. 미국, 스웨덴은 기간에 따라 낙태 허용 여부를 달리한다. 낙태권을 여성의 기본권으로 처음 인정한 미 연방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은 임신 말기 이전의 낙태를 허용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10~12주까지 낙태를 허용하고 있고, 영국과 네덜란드는 24주를 상한으로 삼고 있다. 스웨덴의 경우 18주까지는 낙태 여부가 여성의 선택에 달려 있고, 19주에서 29주 사이에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 낙태가 가능하다.

두번째 방식은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예외적으로 허가하는 방식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채택하고 있다. 낙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되 모자보건법에 따라 몇몇 사유를 충족하는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는데, 모자보건법은 ‘사회경제적 사유로 인한 낙태’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꾸준히 논란이 돼왔다.

여성들은 낙태를 줄이기 위한 근본 대책으로 독일, 덴마크 등의 ‘생부 연대책임 제도’ 도입도 요구하고 있다. 독일 민법은 임신 기간부터 자녀가 3살이 될 때까지(경우에 따라서는 성년이 될 때까지) 생부가 미혼모에 대한 부양의무를 지도록 규정하고 있다. 덴마크도 미혼부의 양육비 책임을 법제화하고 있다. 생부가 이런 의무를 회피하면 아이 엄마는 정부에서 돈을 받을 수 있고, 정부는 생부의 소득 중 일부를 세금으로 원천징수한다.

판례로 보는 낙태죄, “변화가 보인다” 형법 269조와 270조는 낙태한 여성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 낙태를 도운 의사와 조산사 등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반면 면책되는 ‘합법적 낙태’의 관문은 매우 좁다.

낙태죄 판례, 변화의 조짐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 강요는
우리 사회 전체에 부작용 미쳐”
“여성의 자기 결정권도 무시못해”
낙태 여성과 의사 선고 유예도

모자보건법상 임신중절 수술이 허용되는 경우에도 본인과 배우자(사실혼 관계 포함)의 동의가 필요하며, 배우자의 사망·실종·행방불명 및 부득이한 사유가 있을 때에만 본인의 동의만으로 수술이 가능하다. 또 강간으로 인한 임신에서도 합법적 낙태는 어렵다. 강간이라는 점이 증명돼야 합법적 낙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신고를 하지 않거나, 재판 과정에서 범죄 혐의를 충분히 입증하지 못하는 여성들은 졸지에 불법 낙태를 한 범법자가 된다.

2012년 헌법재판소는 낙태 시술을 한 조산사 등을 징역에 처하도록 한 형법 조항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결정한 바 있다. 그러나 재판관 의견이 4(위헌)대 4(합헌)로 팽팽했던 만큼 낙태죄의 폐지 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다.

당시 위헌 의견을 낸 한 재판관은 “낙태를 하는 임부는 대부분 출산과 낙태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지만, 낙태를 하지 않으면 태아와 임부 모두 더 불행해질 것이 예견되기 때문에 낙태를 감행한다고 한다”며 “정신적·육체적으로 낙태를 쉽게 여기는 임부는 없다”고 밝혔다.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지 않는 임신과 출산을 강요하는 것은 임부와 태아, 더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에 여러가지 부작용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낙태를 형사처벌해 출산을 강요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낙태죄에 관한 의미있는 판결들이 나오고 있다. 지난 7월엔 임신중절 수술을 했다고 징역형으로 의사 면허까지 취소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취지의 판결이 나왔다. 대전지법 형사2부(김양희 부장판사)는 “여성의 낙태에 대한 자기결정권 또한 가볍게 볼 수 없다”며 낙태 시술을 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은 산부인과 의사에게 벌금형을 선고하고, 선고를 유예했다.

지난 5월에는 헤어진 여성과 낙태 수술 부탁을 들어준 의사를 협박해 돈을 뜯고 고발까지 한 남성이 징역 1년, 여성과 의사는 선고유예 판결을 받기도 했다. 의정부지법 형사1단독 정성민 판사는 “임신과 낙태를 여성 혼자만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점, 미혼모가 될지도 모르는 여성을 걱정해 수술한 점 등을 고려해 선고를 유예한다”고 밝혔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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