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에서는 시리자 현상과 포데모스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며 기존 정당 지형을 뒤흔들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절정기가 끝난 이후 지구 곳곳에서 시민사회가 아래로부터 꿈틀대고 있지만 기성 정당 체제는 이 격동을 민감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회생과 갱신을 위해서는 시민사회에서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과 밀착된 사회운동형 정당의 자극이 필요하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이번주 토요일(29일)에 북유럽의 작은 섬나라 아이슬란드가 총선을 치른다. 조기 총선이다. 발단은 지난 4월 조세회피처의 실상을 폭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파나마 페이퍼스’다. 이 문서를 통해 진보당(우리 상식과는 달리 우파) 소속 시그뮌뒤르 귄뢰이그손 총리가 조세회피처에 회사를 설립하고도 재산 신고에서 뺀 사실이 들통났다. 분노한 여론에 밀려 귄뢰이그손 총리는 사임할 수밖에 없었고, 내년 4월 예정이던 총선을 앞당겨 실시하게 됐다. 그런데 선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의석이 3석(총 63석)뿐이고 창당한 지 4년밖에 안 된 한 정당의 믿기 힘든 지지율 추이 때문이다. 이 당은 해적당이다. 올해 초에 지지율이 40%까지 치솟았다가 현재는 20%대로 줄기는 했지만 어쨌든 해적당은 지지율 1위를 놓고 우파의 선두인 독립당과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해적당만은 아니다. 사회주의, 여성주의, 생태주의를 내세우는 정당인 좌파녹색운동도 지지율이 20%에 가깝게 오르며 해적당, 독립당을 바짝 뒤쫓는 중이다. 반면 좌파정당들 중에서 유럽연합 가입을 고집해온 정당인 사회민주연합은 지지율이 5%를 맴돈다. 굳이 말하면 해적당은 성격이 스페인의 포데모스에 가깝다. 시민 직접 참여와 인터넷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기본소득제 같은 새로운 구상에 개방적인 점이 그러하다. 한편 좌파녹색운동은 그리스의 시리자와 비슷하다. 사회민주연합 왼쪽의 정치세력들이 모인 조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말하자면 지금 아이슬란드에서는 시리자 현상과 포데모스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며 기존 정당 지형을 뒤흔들고 있다. 이런 정치 격변의 진원은 2009년 초에 아이슬란드를 뜨겁게 달군 시민혁명이다. 이때 아이슬란드 시민들은 매서운 북극 겨울바람에도 불구하고 경제 위기 책임자인 우파 정권과 금융 세력에 맞서 냄비와 프라이팬을 두드리며 의회를 에워쌌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부엌살림살이 혁명’이었다. 이 혁명의 결과로 정권이 물러났을 뿐만 아니라 아이슬란드는 금융위기국 중에서 투기 은행가를 처벌한 유일한 나라가 됐다. 해적당의 뿌리가 바로 이 혁명이다. 시위에 앞장섰던 이들이 ‘시민운동’이라는 이름의 새 정당을 결성했고, 이 당은 곧바로 4인의 의원을 당선시켰다. 그중 한 명이 주부 시인 비르기타 욘스도티르였다. 이후 시민운동당의 통합 재편 과정에서 욘스도티르가 주도해 만든 정당이 해적당이다. 당명의 ‘해적’은 저작권과 정보 독점, 인터넷 감시에 반대하는 정보통신 민주주의를 상징한다. 해적당은 아이슬란드 시민들에게 무엇보다 2012년 헌법안을 수호하는 정당으로 각인돼 있다. 부엌살림살이 혁명 직후 출범한 좌파 연립정부는 시민 참여로 새로운 헌법안을 만들었다. 그 결과 천연자원의 공공 소유, 보편적 인터넷 접근권 등이 담긴 헌법안이 작성됐고, 이 안은 국민투표에서 67%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다음 총선에서 다수 의석을 확보한 우파 정당들이 헌법안의 최종 의결을 미루며 사실상 사문화해버렸다. 해적당은 이 헌법안을 되살리고 여기에 담긴 시민혁명 정신을 복지 확대, 여성 권리 보장, 에너지 전환 등 사회 모든 영역으로 확산하려 한다. 총선에서 해적당이 여론조사 결과만큼 지지를 얻고 계획대로 좌파녹색운동, 사회민주연합과 연립정부를 결성한다면, 이제 이 꿈의 실험이 시작될 것이다. 아이슬란드 해적당은 스페인의 포데모스와 마찬가지로 정당이면서도 조직이나 활동 양상이 사회운동에 가깝다. 이런 정당 형태에는 장점도 있지만 한계도 있다. 온라인을 통한 직접 참여의 강조는 어쩌면 안정된 조직 체계와 그에 바탕을 둔 실천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해적당이 실제 집권하면 이런 한계가 이전보다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이런 정당이 등장하고 득세해야 할 이유가 있다. 신자유주의의 절정기가 끝난 이후 지구 곳곳에서 시민사회가 아래로부터 꿈틀대고 있지만 기성 정당 체제는 이 격동을 민감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회생과 갱신을 위해서는 시민사회에서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과 밀착된 사회운동형 정당의 자극이 필요하다. 총선을 앞둔 아이슬란드의 낯선 정치 풍경은 이 점에서 세계인의 미래를 앞서 보여주는 게 아닐까. 또한 우리의 미래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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