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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1.18 18:28 수정 : 2017.01.18 21:18

브라질 노동자당이 약속만 하고 가지 않은 그 길을 이제 우리가 가야 한다. 정치 문화의 근본적인 변화란 다른 게 아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난 기성 정치의 막후 세력들과 거래하는 유혹을 뿌리치고 오직 광장의 시민들과 함께 모든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치교체’라 불릴 만하다.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2016년에는 남반구와 북반구에서 각각 대통령 탄핵 드라마가 펼쳐졌다. 먼저 브라질에서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이 탄핵을 받아 물러났다. 연말에는 한국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둘 다 대통령 탄핵이지만 맥락은 상당히 달랐다. 우선 탄핵당한 대통령의 정치색부터 정반대다. 호세프는 민주화를 위해 군부 독재에 맞서 게릴라 활동까지 벌인 노동자당(PT) 소속 대통령이었다. 반면 박근혜는 좌파라면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봐야 한다는 원칙을 지닌 사람이다.

한국에서는 법률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을 예상할 정도로 탄핵 사유가 명확하다. 반면 호세프는 처음에는 공기업 돈을 정치자금으로 유용했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정작 탄핵 사유는 이와 별개인 예산안 편법 처리 문제였다.

브라질에서는 호세프가 물러난 지금도 탄핵이 논란거리다. 상하 양원의 다수 의석을 차지한 보수정당들이 노동자당 정부를 뒤집으려고 벌인 ‘합법적 쿠데타’였다는 비판이 분분하다. 부통령이었다가 탄핵 덕분에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미셰우 테메르가 노동자당 정부와는 정반대로 복지 축소와 공공부문 사유화에 혈안이 된 것을 보면 이런 비판이 일리 있다 싶다.

그러나 설령 의회 쿠데타였다 할지라도 노동자당의 책임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룰라 전 대통령이나 호세프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더라도 노동자당의 다른 주요 정치인들은 분명히 공기업 자금 유용에 가담했다. 보수정당 정치인들과는 달리 이 돈을 개인 치부에 쓰지는 않았다. 보수정당들을 노동자당 연립정부에 끌어들이는 대가로 뒷돈을 주는 데 써먹었다. 하지만 이게 변명거리가 될 수는 없다. 명백한 불법이고 부패다.

브라질 노동자당은 한동안 전세계 진보좌파의 희망이었다. 노동자당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성과를 노동자 정치세력화로 이어가는 데 성공한 드문 사례였다. 이 당이 지방정부에서 벌인 실험도 볼만했다. 노동자당 소속 지방자치단체장들은 보수파 다수의 지방의회가 번번이 예산안을 거부하자 시민이 직접 짠 예산안으로 지방의회를 압박했다. 시민참여예산제라는 이름이 붙은 이 방식은 멀리 한국의 지방자치단체들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노동자당은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2002년에 노동운동 지도자 출신인 룰라 후보를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집권하자 룰라는 보수정당들까지 포함한 연립정부를 결성했다. 이 때문에 과거 지지자들 중 상당수가 실망했다. 하지만 원내 다수의 지지 덕분에 별 마찰 없이 빈곤층 복지수당 같은 사회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합의형 정치의 모범이라고 칭송받았다. 호세프가 뒤를 이어 연거푸 재집권에 성공하자 이런 평가가 굳어지는 듯싶었다.

그러나 탄핵으로 드러난 실상은 기대와 너무도 달랐다. 합의형 정치는 실은 눈먼 돈으로 밀실에서 벌인 추잡한 거래와 야합이었다. 노동자당 정치인들은 의회에서 법안이나 예산안을 통과시키려면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이런 선택 때문에 노동자당은 부패한 다른 정당들이 “너희도 똑같지 않냐”고 삿대질할 때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낡은 정치인들의 권력과 부패 구조는 더욱 막강해졌다.

이 점에서 브라질의 탄핵 드라마는 맥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요즘 탄핵 이후 한국 사회의 과제들을 놓고 말들이 많다. ‘복지’를 말하기도 하고 ‘재벌 개혁’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과제가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은 정치 문화의 근본적인 변화다.

브라질 노동자도 집권 전에는 정치 문화 혁신을 약속했다. 의회나 관료기구 내 보수파의 반대로 개혁이 가로막히면 시민참여예산제 방식으로 돌파하겠다고 했다. 시민 참여로 기득권 세력을 압박하고 정치판을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당은 집권 후에 애초 약속했던 방식이 아니라 ‘편한’ 길을 택했다. 그래서 결국 기성 정치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노동자당이 약속만 하고 가지 않은 그 길을 이제 우리가 가야 한다. 정치 문화의 근본적인 변화란 다른 게 아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난 기성 정치의 막후 세력들과 거래하는 유혹을 뿌리치고 오직 광장의 시민들과 함께 모든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치교체’라 불릴 만하다. 벌써 오염된 말이 돼버렸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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