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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6.07 19:43 수정 : 2017.06.07 20:56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오늘(8일)은 영국 총선 투표일이다. 본래 다음 총선은 2020년으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협상 중이던 보수당의 테리사 메이 총리가 조기 총선 카드를 꺼내는 바람에 느닷없이 선거 정국이 시작됐다.

4월에 하원에서 조기 총선안이 통과될 때만 해도 보수당의 인기는 압도적이었다. 브렉시트 협상을 책임진 보수당 정부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여론 탓이기도 했지만, 급진좌파 성향의 노동당 대표 제러미 코빈이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아서 노동당 지지율이 정체됐기 때문이기도 했다. 모든 여론조사에서 보수당은 무려 20%포인트 이상 노동당을 앞섰다.

그러나 선거운동 기간에 놀라운 드라마가 펼쳐졌다. 노동당 지지율이 상승하더니 급기야 투표일을 며칠 앞두고는 불과 1%포인트 차이로 보수당을 맹추격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양당의 총선 공약집이다.

보수당 공약집은 이른바 ‘치매세’ 논란을 일으켰다. 노인들에게 제공되던 재가 요양 서비스의 지원 범위를 축소하겠다는 공약 때문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신앙이 돼버린 긴축 기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다 보니 이렇게 사회적 약자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공약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소수가 아니라 다수를 위해’라는 제목을 단 노동당 공약집은 과감한 탈긴축 기조를 천명했다. 사유화로 너덜너덜해진 국민보건서비스(NHS)를 원상회복하고, 천정부지로 치솟은 대학 등록금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복지국가 복원에 드는 비용은 소득 상위 5%에 한해 소득세를 올리고 법인세를 인상해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이렇게 상반되는 내용의 두 당 공약집이 공개된 뒤에 보수당 지지율은 떨어진 반면 노동당 지지율은 급상승했다.

노동당 총선 공약집은 한마디로 신자유주의 ‘이후’ 세상을 열겠다는 선언이다. 신자유주의 원산지 중 한 곳인 영국에서 나온 탈신자유주의 청사진이다. 복지 관련 공약 말고도 여러 대목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노동 공약을 보자. 영국에서 불안정 고용의 상징이 된 ‘0시간 계약직’(업무시간이 보장되지 않은 채 시간당 임금을 지급하는 근로계약)을 폐지하고, 노동조합의 권한을 강화하겠다고 한다. 또한 최저임금을 생활임금 수준으로 올리고, 공공부문과 관급 기업부터 최고임금 상한제를 실시하겠다고 한다. 노동 현장에서부터 한쪽으로 기운 힘의 균형을 뒤집겠다는 것이다.

노동당 공약집은 기업이 저임금과 불안정 고용에 집착하는 이유를 단기 이윤만 좇는 주주의 과도한 권력에서 찾는다. 그래서 회사법을 개정해 이사회 구조를 바꾸겠다고 약속한다. 주주 외에도 노동자, 소비자, 시민사회 등의 대표들이 참여하게 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끝내자면, 기업 내 주주 권력뿐만 아니라 금융 질서도 손봐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한 노동당의 답은 기존 금융 체계에 맞설 공공 금융의 중심으로 국영투자은행을 설립한다는 것이다. 국영투자은행의 주된 역할은 지역별 공공 투자은행의 네트워크를 뒷받침하는 일이다. 지역별 공공 투자은행은 지역사회의 면밀한 고려를 바탕으로 중소기업, 협동조합, 장기 연구개발 등에 집중 투자한다.

이런 대대적인 공공 투자가 노리는 바는 산업 구조 재편이다. 마거릿 대처 집권기에 영국은 제조업 기반을 잃고 금융업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신세가 됐다. 노동당은 이것이 영국인의 숙명임을 거부한다. 공공 투자은행들이 나서서 철도 현대화, 재생가능에너지 확대, 광대역 통신망 구축 등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게 영국 산업이 새로 출발할 기반을 조성하겠다고 한다.

이런 원대한 비전이 오늘 총선에서 과연 어떠한 평가를 받을까? 노동당이 워낙 열세로 시작한 선거이기에 보수당의 부진은 몰라도 노동당의 승리까지 기대하기는 힘들지 모른다. 두 차례 테러로 어수선한 상황이라는 점도 야당에는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조기 총선의 최종 결과와는 별개로 노동당 총선 공약은 이미 커다란 역사적 성과를 남겼다. 덕분에 새 시대의 좌표가 더욱 분명해졌다. 신자유주의 ‘이후’에 민주 사회가 가야 할 길이 보다 뚜렷해졌다. 영국인들만이 아니라 촛불의 ‘정치’ 혁명을 이을 ‘사회경제’ 혁명을 모색하는 우리에게도 이는 훌륭한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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