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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1.29 17:52 수정 : 2017.11.29 19:25

싱은 영국의 제러미 코빈을 연상시키는 돌풍을 일으켰다. 단지 젊고 남아시아계라는 점 말고도 주의원으로서 소수자 인권 보호에 앞장선 이력이 주목받았다. 그가 대변한 소수자는 이주민만이 아니었다. 성소수자들도 있었다. 또한 최저임금 인상, 누진과세 강화 같은 공약은 청년층의 호응을 얻었다.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캐나다의 제3당인 신민주당(NDP)이 지난 10월1일 새 대표를 뽑았다. 비록 이름이 미국 민주당과 비슷하지만, 신민주당은 캐나다의 대표 진보정당이다. 그런데 이번에 뽑은 대표가 이채롭다. 새 대표의 이름은 자그미트 싱. 1979년생으로 40살이 채 안 됐다. 나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시크교도 이주민이라는 사실이다. 인도계 가정에서 태어난 이민 2세이고, 증조부는 인도 독립운동가였다.

우선 캐나다 정치 지형부터 짚어보자. 캐나다는 미국의 이웃나라이지만, 정치 지형은 미국과 서유럽 중간쯤 된다. 미국처럼 캐나다도 오랫동안 보수당 대 자유당의 양당 구도 아래 있다. 그러나 미국과 달리 유력한 제3당이 존재한다. 그게 신민주당이다.

이 당은 연방 하원에도 진출해 있고, 몇몇 주에서는 일찌감치 집권 경험을 쌓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일정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집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캐나다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소선거구제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승자독식 선거제도는 기존 양대 정당에 도전하는 신진 세력에게 너무도 불리했다. 그래서 신민주당은 의석이 늘 하원 전체의 10% 안팎에 머물렀다.

이 장벽을 처음 깬 것이 2011년 총선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보수당, 자유당 모두 신망을 잃자 신민주당이 급속히 대안으로 부상했다. 이런 약진에는 당시 당대표이던 잭 레이턴의 공이 컸다. 신민주당은 자유당을 누르고 원내 제2당이자 제1야당이 됐다.

그러나 곧바로 난관이 닥쳤다. 안타깝게도 레이턴 대표가 몇 달 뒤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반면 충격에 휩싸였던 자유당은 1971년생 쥐스탱 트뤼도를 새 얼굴로 내세워 면모를 일신했다. 그 결과 2015년 총선에서 트뤼도가 캐나다의 새 총리가 됐고, 신민주당은 의석이 레이턴 바람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다(총 338석 중 40석).

올해 신민주당 대표 선거는 이런 부진을 털고 다시 도약에 나설 기회였다. 당원 투표로 결정되는 이 선거에 평소보다 많은 후보들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최종 등록한 4명의 후보 가운데 처음부터 단연 눈에 띈 이는 싱이었다. 그는 연방 하원의원도 아니었다. 온타리오 주의원이었다. 중앙 정계에서는 신참이다. 게다가 시크교 관습대로 늘 수염을 길게 기른 채 커다란 터번을 쓰고 다닌다. 상식대로라면 제일 경쟁력 없는 후보였다.

뜻밖에도 신민주당 당원들의 판단은 이런 상식과는 정반대였다. 싱은 2년 전 영국 노동당 대표 경선의 제러미 코빈 바람을 연상시키는 돌풍을 일으켰다. 단지 젊고 남아시아계라는 점 말고도 주의원으로서 소수자 인권 보호에 앞장선 이력이 주목받았다. 그가 대변한 소수자는 이주민만이 아니었다. 성소수자들도 있었다. 또한 최저임금 인상(시간당 약 1만3천원으로 인상), 누진과세 강화 같은 핵심 공약은 청년층의 호응을 얻었다. 결국 싱은 53.8%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새 대표로 선출됐다.

놀라운 선택이다. 캐나다라고 누구나 다 남아시아계 시크교도를 총리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실은 정반대다. 더구나 지금 남쪽 이웃나라에서는 인종주의가 창궐하는 중이다. 대표 경선 과정에서도 한 여성이 싱 후보에게 “캐나다에 샤리아 법을 강요할 테냐”고 항의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샤리아는 이슬람교 율법이다. 시크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도 싱 후보를 이슬람 근본주의자로 취급한 것이다.

싱이 침착하게 대응하는 모습이 동영상으로 찍혀 유포되는 바람에 이 사건은 대표 경선에서 오히려 호재가 됐다.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백인 중심의 캐나다 주류 언론이 벌써부터 싱의 출신과 종교를 물고 늘어지는 모습에서 이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신민주당은 쉽지 않은 모험을 택한 셈이다. 그러나 분명 의미 있고 시의적절한 모험이다. 진보정당의 과제는 의석 확대와 집권만이 아니다. 동시대인들의 의식을 넓히고 새로운 상상력을 여는 일도 진보정당의 중요한 과제다. 아니, 어쩌면 상식의 재구성이 집권보다 더 근본적이고 우선적인 과제다.

싱을 대표로 선출함으로써 신민주당 당원들은 캐나다 사회의 상식을 저 위쪽 어딘가로 전진시켰다. 다음 선거에서 신민주당의 성적을 받아들기 전에 벌써 이 당이 지금 캐나다 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임을 유감없이 입증했다. 그들에게 한 수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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