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03.29 18:42 수정 : 2018.03.30 15:48

참으로 기이하다. 국회의원 선출에서 비례성을 강화하자는 개헌안을 제출한 대통령이 속한 정당, 즉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각 광역시도의회에서 정확히 이와 반대되는 결정에 앞장섰다. 4인의 기초의원 당선자를 내는 선거구를 모조리 2인 선거구로 나눠 놓았다.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최근 대한민국 각급 대의기구가 모처럼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국회는 개헌 논의로 시끄럽다. 개헌 절차를 놓고 지루한 공방만 계속하더니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하자 뒤늦게 본격 협상에 들어갔다. 국회만이 아니다. 평소 무슨 일 하는지 잘 눈에 띄지 않는 광역시도의회도 한동안 관심거리가 됐다. 기초의회 선거구 획정 때문이었다.

일단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을 보면, 주목할 만한 내용이 여럿 담겨 있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제44조 3항이다. “국회의 의석은 투표자의 의사에 비례하여 배분해야 한다.” 국회의원 선출에 비례성이 관철되어야 함을 명시한 것이다. 소선거구제 중심인 현행 선거제도와 달리, 정당 지지율 그대로 의석이 배분돼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오랫동안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주장해온 진보정당한테는 너무도 반가운 개정안이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하다. 국회의원 선출에서 비례성을 강화하자는 개헌안을 제출한 대통령이 속한 정당, 즉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각 광역시도의회에서 정확히 이와 반대되는 결정에 앞장섰다. 4인의 기초의원 당선자를 내는 선거구를 모조리 2인 선거구로 나눠 놓았다. 비록 비례대표제는 아니더라도 4인 선거구는 그나마 다양한 색깔의 기초의원을 배출하는 통로였다. 한데 더불어민주당은 자유한국당과 함께 이 통로마저 닫아버렸다.

여당의 이 이율배반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통령과 여당이 철학과 노선이 전혀 달라 엇나가는 것인가? 아니면 국회의원 선거는 비례성이 보장돼야 하지만 지방의원 선거는 그렇지 않다는 독특한 신념이라도 있는가? 이런 게 아니라면 정부와 여당의 진심은 어느 쪽인가? 개헌안에 담긴 선거제도 개혁인가, 아니면 기초의회 선거구 획정이 보여주는 선거제도 개악인가?

이렇게 문제제기를 하면, 이른바 소수정당의 밥그릇 투정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글쎄, 이게 단지 몇몇 정당의 좌절로만 끝날 문제라면 이렇게까지 참담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따져보자. 여당이 솔선해서 기초의회 선거구를 2인 중심으로 일괄 정리해준 덕분에 생명 연장의 황금 같은 기회를 얻은 게 누구인가? 이 문제에 한해서만은 여당과 대연정 수준의 공조를 과시한 자유한국당이다.

모두들 6월 지방선거를 바라보며 광역단체장 선거 결과가 어떻게 될지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러나 이 결과와 상관없이 이미 정해진 게 있다.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기초의회는 여당 그리고 이들과 거의 백중세인 자유한국당 당선자들로 채워지리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2인 선거구의 마술이다.

50% 가까운 지지를 받는 정당이 그만큼 의석을 받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반대쪽에서는 점점 더 지지를 잃어가는 어느 정당이 절반 가까운 의석을 차지하며 헬조선의 익숙한 풍경을 2022년까지 연장할 운명이다. 이 지옥도를 다름 아니라 촛불 ‘혁명’을 말하는 정당이 만들어주었다.

더 소름 끼치는 이야기도 있다.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에는 이런 조항도 있다. “대한민국은 지방분권국가를 지향한다.” 무려 제1조에 신설된 내용이다. 문구만 보면 과도한 중앙집권 구조를 혁파하려는 시대정신을 담은 듯 보인다.

그러나 여당이 열어놓은 지방정부의 현실을 대입해보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중앙정부와 달리 시대착오적 세력이 여전히 양대 정당의 하나인 양 군림할 지방정부들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겠다는 이야기가 된다. 서로 이율배반인 대통령 개헌안과 여당의 지방정부관이 합쳐지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림이 나오게 된다.

30년 전 6월 항쟁에서도 민주화 바람은 중앙정치만 휩쓸었을 뿐 지역까지는 좀처럼 미치지 못했다. 민주화로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하자 오히려 지역 토호들이 지방선거를 발판 삼아 영향력을 더욱 키웠다. 민주화의 결실을 누린 것은 거리와 노동 현장의 대중이 아니라 재벌과 풀뿌리 보수 세력이었다.

30년 뒤 촛불 항쟁은 어느 길을 향하고 있는가? 혹시 6월 항쟁이 걸은 길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개헌과 지방선거를 둘러싼 여당의 어지러운 행보를 보니 도무지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4월 혁명의 빛나는 꿈이 퇴색하자 김수영 시인이 토한 탄식이다. 또다시 4월을 앞두고 나는 이 탄식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음이 두렵기만 하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장석준의 그래도 진보정치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