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상황은 보는 이를 불길한 기시감에 빠뜨린다. 지금의 모습은 100년 전 대공황을 배경으로 파시스트 정권들이 들어설 때와 너무도 닮았다. 그때도 기존 좌우 정당들은 경제사회위기를 완화할 적극적 재정 정책을 펼치길 주저했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두 달 전인 3월에 총선을 치른 이탈리아에 이제야 새 정부가 들어서려 한다. 평소 같으면 언론이 쌍수 들어 환영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유럽 주류 언론은 환영은커녕 울상을 짓고 있다. 연립정부를 구성한 두 당 때문이다. 한 정당은 신생 오성운동이다. 오성운동은 2009년 코미디언 베페 그릴로가 주도해 창당했고, 유럽 경제위기가 한창일 무렵 ‘유로존 탈퇴’를 외치며 급성장했다. 이번 총선에서 기본소득 도입(1단계로 빈곤층에 한해 지급)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운 오성운동은 하원 정당투표에서 32.66%를 얻었다. 단일 정당으로는 최다 득표다. 그래서 이 당이 총선 후 정부 구성 협상을 주도했다. 다른 한 정당은 우파 정당들의 선거연합을 결성해 총선에 임한 동맹당이다. 이 당은 본래 이름이 ‘북부동맹’으로 북부 이탈리아에서 반남부 지역감정을 자극해 성장했다. 하지만 현재는 전국정당을 지향하며 그냥 ‘동맹’이라 자처한다. 동맹당은 독일대안당이나 프랑스 국민전선처럼 ‘유럽통합 반대, 이민 반대’를 내세운다. 오성운동이 좌우가 모호한 포퓰리즘 세력이라면, 동맹당은 확실한 극우 포퓰리스트다. 이 당은 우파연합 소속 정당들 중 가장 많은 17.37%를 얻었다. 유럽 엘리트들로서는 오성운동이나 동맹당 중 어느 하나만 정부에 참여해도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예 이 두 당이 유로존 안에서 경제 규모가 3위인 나라의 정부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스에서 시리자가 집권했을 때보다 훨씬 심각한 적신호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오성운동이 맨 처음 연립정부 결성을 제안한 정당은 동맹당이 아니었다. 총선 전 집권당이었고 흔히 중도좌파로 분류되는 민주당이었다. 민주당은 5년 전 총선에서는 29.6%를 얻으며 제1당이 됐지만, 이번에는 하원 정당투표에서 18.72%를 얻는 데 그쳤다. 오성운동이 총선의 최대 승자라면, 민주당은 최대 패자다. 가난한 남부 이탈리아에서 바람을 일으킨 오성운동은 민주당에 실망한 좌파 성향 유권자들을 대거 흡수했다. 오성운동은 이를 의식해 민주당을 첫번째 협상 상대로 삼았다. 그러나 민주당이 이를 뿌리쳤다. 민주당 안에서도 마테오 렌치 전 총리가 이끄는 분파가 가장 완강히 반대했다. 그래서 오성운동이 다음 상대로 고른 게 동맹당이었다. 오성운동-동맹당 연립정부가 숙명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 민주당은 왜 공동집권 제안을 거부했는가? 이들은 기본소득 도입을 포함한 오성운동의 적극적 재정 정책을 주된 이유로 들었다. 오성운동 공약대로 하면 재정 적자 규모가 유럽연합이 허용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 다시 재정 위기에 빠진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탈리아의 심각한 경제 침체를 극복하려면 얼마나 공격적인 재정 확대 정책이 필요한가가 쟁점이었던 셈이다. 이는 실은 민주당 총선 참패와도 직결된 쟁점이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이탈리아는 유럽연합의 압박 아래 긴축 기조를 이어왔고, 그 결과는 경제 침체와 사회 위기의 악순환이었다. 이른바 포퓰리스트 세력들이 급성장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민주당 정부의 렌치 전 총리 역시 유럽연합의 긴축 압박에 나름대로 저항했다. 그러나 이를 정면 거역하지는 못해서 정리해고 요건 완화 등 노동법 개악을 시도하다 지지 기반만 상실하고 말았다. 총선 결과에서 드러난 대로 지지층의 3분의 1이 빠져나갔다. 이런 이탈리아 상황은 보는 이를 불길한 기시감에 빠뜨린다. 지금의 모습은 약 100년 전 대공황을 배경으로 파시스트 정권들이 들어설 때와 너무도 닮았다. 그때도 기존 좌우 정당들은 경제사회위기를 완화할 적극적 재정 정책을 펼치길 주저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때도 주류 정당들은 금융 세력이 강요하는 재정 운용 기준에 발이 묶여 있었다. 나치당 같은 세력은 바로 이런 현실을 공격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모았다. 강 건너 불구경으로 치부할 문제만은 아니다. 한국의 경제 사정도 전망이 썩 밝지 않다. 촛불로 한껏 고양됐던 사회 개혁 열기가 불황과 실업 탓에 좌절과 실망으로 반전될 위험이 적지 않다. 이런 때일수록 복지를 대폭 확대하는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재정 정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재정 건전성 미신부터 넘어서야 한다. 향후 몇년간 진보 세력의 긴급한 과제 중 하나가 이것이라 믿는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