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두 정부의 잇단 실정 탓에 주류 우파는 노동자당에 맞설 대안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대신 뜻밖의 주변인이 돌풍을 일으켰다. 우파-기득권층이 반노동자당 운동을 펼치며 불붙인 인종주의, 빈민층 혐오, 기독교 근본주의를 가장 적나라하게 대표할 준비가 된 인물, 보우소나루였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지난 7일 일요일 실시된 브라질 대통령선거 1차 투표에서 극우 사회자유당(PSL)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후보가 46.03%를 득표하며 압도적 1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과반수에는 미치지 못했기에 28일 2차 투표에서 노동자당(PT)의 페르난두 아다드 후보와 맞붙어야 한다. 아다드 후보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노동자당이 후보를 늦게 결정했음에도 불과 몇주 만에 29.28%로 약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1차 투표 지지가 무려 45% 선을 넘은 보우소나루 쪽이 결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은 분명하다. 브라질 주식시장은 벌써부터 노동자당 집권을 저지했다며 환호하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보우소나루의 이념과 정책이다. 그는 단순한 우파가 아니다. 어떤 기준으로 봐도 ‘파시스트’라는 규정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군부독재 시절을 찬양하며 좌파 인사는 고문받아 싸다고 내뱉는다. 백인 인종주의와 남성 우월주의를 내세우면서 유색인종, 여성, 성소수자를 인간 이하 취급한다. 집권하면 군부를 정치에 참여시키겠다고 하고, 결선에서 본인이 떨어지면 쿠데타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엄포를 놓는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1980년대 중반)에 민주화를 시작한 브라질에서 어떻게 이런 인물이 절반에 가까운 지지를 받기에 이르렀는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노동자당이 집권했던 2003~20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룰라에 이어 지우마 호세프가 이끌었던 노동자당 정부는 복지 확대로 빈곤 문제를 완화하는 등 성과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노동자당이 그토록 오래 집권했음에도 기득권층과 서민의 힘의 균형에는 변화가 거의 없었다. 노동자당 정부가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살 수 있는 조치는 의도적으로 피했기 때문이다. 국가기구를 민주화하려는 노력도 없었고, 하다못해 복지를 확대한다면서 부유층 세금 부담조차 늘리지 않았다. 복지 재원은 2000년대 자원 수출 호황 덕에 늘어난 세수로 충당했다. 오히려 노동자당은 상·하원 의석 다수를 차지한 우파 야당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의석이 많은 우파 정당을 매수해 연립정부에 끌어들였다. 여기에 공기업 비자금에서 나온 검은돈을 동원하는 바람에 노동자당은 부패 추문에서 자유롭지 못한 처지가 됐다. 말하자면 노동자당의 부패 혐의조차 실은 대립을 피하는 데 급급한 소극적 타협 전략의 산물이었다 할 수 있다. 그럼 노동자당 정부의 이런 저자세 타협 전략에 우파-기득권 세력은 흡족해했던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남부 대도시 노동운동에서 출발한 노동자당이 빈곤타파 정책 덕분에 낙후한 북부로 지지를 넓히는 것을 불안하게 바라봤다. 호세프 연임 뒤에 룰라 전 대통령이 다시 대선에 나와 노동자당 집권이 20년 넘게 이어질 가능성에 치를 떨었다. 그래서 행동에 나섰다. 마침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자원 수출 호황이 끝나고 극심한 불황이 시작됐다. 주류 우파는 좌파 정부가 북부 빈민만 위하는 바람에 경제가 안 좋아졌다며 남부 중산층을 선동했다. 반노동자 대중운동이 시작됐다. 이를 배경으로 사법 엘리트들이 노동자당을 정조준한 부패 수사에 착수했고, 2016년 결국 호세프 정부가 탄핵으로 무너졌다. 그 뒤 2년 동안 주류 우파로 구성된 과두 정부가 브라질을 통치했다. 그러나 주류 우파는 자신들이 기획, 추진한 정치 난동극의 수혜자가 되지 못했다. 과두 정부의 잇단 실정 탓에 주류 우파는 노동자당에 맞설 대안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대신 뜻밖의 주변인이 돌풍을 일으켰다. 우파-기득권층이 반노동자당 운동을 펼치며 불붙인 인종주의, 빈민층 혐오, 기독교 근본주의를 가장 적나라하게 대표할 준비가 된 인물, 보우소나루였다. 말하자면 보우소나루는 반노동자당 우파가 만들어낸 괴물이다. 2차 투표가 아직 남아 있지만, 지금까지 전개만으로도 지구 반대편의 우리를 오싹하게 만드는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기득권층과 기성 엘리트를 달래려고만 드는 ‘개혁’의 결말이 이러하다. ‘개혁’이 이렇게 허약함을 드러내면, 구세력은 반드시 반격에 나선다. 권력욕 앞에서 뇌물 따위는 힘을 발휘할 수 없다. 그리고 허울뿐인 개혁과 반개혁이 맞부딪힐 때에 선거 민주주의는 곧잘 괴물의 둥지가 되곤 한다. 브라질의 대혼란은 우리에게 이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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