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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8.28 17:44 수정 : 2016.08.28 19:00

이승욱
닛부타의 숲 정신분석클리닉 대표

안경을 끼는 사람이면 누구나, 확신하건대 100퍼센트, 안경을 낀 채 안경을 찾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 핸드폰을 찾아도 보았을 것이다. 심지어 핸드폰을 찾기 위해 딸아이에게 전화해서 핸드폰 못 봤냐고 묻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업은 아이 삼 년 찾는다’는 옛 속담도 생각난다.

문제는 안경의 혼란이다. 번연히 주인이 필요로 하는 바로 그곳에 자리잡고 할 일을 하고 있는데도 없다고 찾아다니면 도대체 나(안경)는 세상에 있는 존재인가? 손에 쥐고도 없다고 믿는 그 핸드폰은, 등에 업힌 아이는 도대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실제로는 있지만 인식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런 상황을 ‘실재’하지만 ‘실존’하지는 않는다, 라고 말한다. 의미세계에서 안경은 발견조차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눈 위에 있지만 없다고 믿어지는 그 안경은 ‘비존재’로 불린다.(비존재를 주제로 한 이야기는 앞으로도 여러 번 더 하게 될 것 같다.)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자. 내가 앉아 있는 사무실 문을 동료가 열고는 자신이 찾는 사람이 없다고 ‘아무도 없네’라며 문 닫고 가버린다. 그래, 한 번은 봐준다 치자. 그런데 연이어 여러 명의 동료가 계속 문을 열고 두리번거리며 자신이 찾는 사람이 없다고 ‘아무도 없네’를 연발하고 가버린다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비존재로 전락한다. 내 존재가 무화(無化)되는 경험이다. 응시는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능동적 관심의 증거다.

필자는 평소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부모들을 눈여겨본다. 직업적으로 부모-자녀 관계에 깊게 관심을 기울이는 습관 때문이다. 아무래도 가장 흔히 보는 모습은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엄마들이 아이들을 잘 바라보지 않는다. 유모차에 탄 아이가 20분 가까이 불편해하며 징징거려도 눈길 한 번 안 주고, 말로만 아이를 달래는 엄마를 서점에서 본 적이 있다. 그 엄마가 뒤적거리며 찾는 책들은 모두 아이 잘 키우는 법, 육아책이었다. 고작 대여섯 살 된 아이를 제대로 챙기지 않고 혼자 벌떡 일어나 버스에서 내리는 엄마들도 많이 봤다. 아이가 위험하게 장난을 쳐도 엄마는 스마트폰에 눈을 박고 있다. 아버지들은 응시라는 행위를 하기도 전에 이미 가족 관계에서 자의건 타의건 배제된 경우가 많으니 비판조차 할 수 없다.

말이 가진 힘도 무한하지만, 응시에 품어진 사랑과 증오, 관심과 무심의 메시지는 치명적이다. ‘대화’니 ‘소통’이니 이런 다 죽어빠진 말들을 반복하는 것은 오히려 관계의 공허를 자꾸 확인시키는 것 같다. 차라리 얼굴과 시선의 각도를 같이 하고(그러지 않으면 째려보는 것이 된다!) 가족과 친구, 동료들과 내 주변에서 나를 도와주는 많은 사람들을 하루 단 한 번이라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면 세상에는 당연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수도 있겠다.

엄마들의 무응시에 소외된 아이들처럼, 세상의 모든 가난하고 약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도 자신을 바라봐 달라고 호소한다. 김포공항 비정규직 청소노동자, 삼척 동양시멘트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세월호 유가족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심지어 우리의 야식을 책임지고 위험한 밤길을 달리는 철가방 오빠의 오토바이들도 자신들을 바라봐 달라고 절규하지 않는가? 바라봐라 바라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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