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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1.21 17:10 수정 : 2018.01.21 19:05

이승욱
닛부타의숲·정신분석클리닉 대표

내 아버지 고향은 이북이다. 비록 남한 땅에서는 일가붙이 하나 없는 외톨이였지만 1·4 후퇴 이전에는 함경도 단천 어느 고을의 전주 이씨 집성촌에서 15대를 살아왔다고 들었다. 아버지의 전언에 의하면 우리가 피난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자발적이지 않은 피난민들이 많았다고 한다.

미군들이 중공군과 북한군이 머무를 곳을 아예 없애기 위해 주민들을 모두 강제소개하고 마을에 폭격을 하거나 집들을 불 싸질렀다고 한다. 피난민 대열이 낀 수많은 사람들은 공산당이 싫어서가 아니라 미군의 폭격에 죽지 않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는 것이다(미국 해군은 흥남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님을 포함하여 수천명의 피난민을 살렸다지만, 내 조부모님들을 포함하여 그들의 포격에 죽어간 민간인은 수십배가 넘을 것이다).

죽지 않으려 강제로 떠밀려 피난 가는 행렬은 이미 육로가 끊긴 긴박한 상황에서 모두 항구로 몰렸다. 함경도의 부두는 흥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일가와 친척들도 어느 작은 항구에 당도했으나 배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했다. 피난민들을 몰아 놓고는 가까운 거리에서 함포사격을 해대니 모두는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그 난리통에도 금붙이를 받고 사람을 태우는 장사꾼들이 있었다. 부르는 뱃삯이 워낙 거금이라 집안의 장남이라도 살리려는 할아버지의 강권에 밀려 아버지는 곧 돌아오마는 약속만 남기고 혼자 배를 타셨다. 그리고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6월부터 시작된 전쟁의 전선이 채 반년도 되기도 전에 두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했으니 길어야 한 두 달 안에 돌아오리라 생각했다고 하셨다. 아무리 전쟁이지만 한 민족이, 아니 한 가족이 그렇게 터무니없이 오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고 했다.

무뚝뚝하기로는 경상도 찜 쪄 먹을 함경도 사나이가, 가끔 눈물을 훔치며 말수가 많아질 때가 있었다. 설이나 추석 명절 때면 유난히 고향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언젠가 한번은, 내가 중학생 무렵이었을 때, 나를 앞에 앉혀 놓고 당신의 이북 가족들에 대해 소상히 말해 주신 적이 있다. 단천의 풍경과 그 사람들의 삶, 그리고 가족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려 주었다. 그날 술에 거나해진 아버지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훔치며 마지막으로 내게 하신 말씀은 “욱아 언젠가는 통일이 되겠지?”였다. 나는 그날 단 한 번 들었던 아버지의 이북 가족들 이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북의 가족들 소식조차 모르고 아버지는 약 20년 전에 돌아가셨다. 당시 외국에 있던 나는 비행기를 타지 못해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아들을 기다리며 하루이틀을 더 힘겹게 호흡을 붙들고 계시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유언을 남기셨다. 아버지가 막바지에 다다랐음을 직감한 큰누이가 아버지 목소리라도 한 번 더 듣고 싶어서 ‘아버지, 빨리 집에 가요. 빨리 나아서 집에 가요’라고 울면서 아버지 귀에다 대고 말했다. 그러자 며칠간 혼수상태에 빠져 계시던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집은 함경북도 단천군 단천면 동호리입니다.” 그것이 남한의 가족들에게 우리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말씀이셨다.

67년 전 1월4일에 이산된 우리 집안의 고통은 대를 물려 내게도 남아 있다. 평창올림픽 북한 선수단 오는 것도 좋고, 예술단 파견도 좋지만 제발 이산가족들의 만남을 상설화하고 고향 방문도 자유롭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하루빨리 아버지의 유골을 안고 아버지 고향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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