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똑똑똑. 이건 덜 잠긴 수도꼭지 물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다. 이건 <한겨레>에서 힐링(?) 꼭지를 제안받았을 때 내 머릿속에, 각박한 영화판을 전전하며 힐링이라고는 시나리오 한 장면 완성할 때마다 뻑뻑 피워대는 담배 한 개비가 전부인 힐링불능자 김곡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성어이고, 그동안 닫을 줄만 알았지 열 줄은 몰랐던 마음의 문을 열어보자는 기개로 나름 생각해낸 소리, 즉슨 대화를 위해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 똑똑똑이다. 똑똑똑. 살아 계십니까? 똑똑똑. 안녕하십니까? 똑똑똑. 요새 잘 지내나요? 그래. 요새같이 각박한 세상에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똑똑똑인가 보다. …라며 꼭지 제목 참으로 잘 지었다며 자화자찬하고 있는데, 어쿠나. 다시 돌아보니 이 세상엔 이미 너무 많은 똑똑똑이 있다. 도시는 이미 너무 많은 간판들과 광고판들로 도배되어 있어서 길 걷는 잠재적 소비자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고, 티브이는 이미 너무 많은 채널들과 시청률 경쟁 드립으로 잠재적 시청자들의 마음과 리모컨을 두드리고 있지 않은가. 그뿐인가. 핸드폰엔 에스엔에스(SNS) 친구들이 쉴 틈을 주지 않고 똑똑똑. 컴퓨터 속엔 유튜브 친구들이 무수한 채널들로 똑똑똑. 우리네 삶의 1분 1초가 이미 모두 똑똑똑. 똑똑똑이다. 똑시 똑분 똑초. 이건 거의 똑똑똑 폭격 수준,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라 소음 수준이다. 게다가 똑똑똑의 소음에 비해서, 정작 그렇게 마음의 문을 열었을 때 이루어지는 대화는 얼마나 초라하고 빈약한가. 야. 왜. 뭐 함? 숨쉼. ㅇㅇ. 짱나. 나도. 너도. 우리도. ㅇㅇ. ㄱㄱ. ㄴㄴ. ㅇㅇ. ㅠㅠ. 실제로 페이스북에 ‘찔러보기’ 기능이 추가되어 놀란 적이 있다. 찔러보기란, 지금 접속해 있는 상대 페친이 나와 대화를 할 수 있는지, 아니면 단지 채널만 열어놓고 있어서 대화할 수 없는지 체크해보는, 순전히 기능적인 똑똑똑이었다. 이쯤 되면- 이 세상이 각박함은 똑똑똑이 너무 없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똑똑똑이 너무 많아서, 똑똑똑만 너무 흘러넘쳐서가 아닐까. 마치 빈 수레가 요란한 소리로 자신을 채워야 하는 것처럼, 정작 문을 두드려 열어도 별 할 말 없는 우리들이 그처럼 빈곤한 내면을 채우기 위해서 요란하게 문만 두드리듯, 우린 이미 똑똑똑에 중독된 자들, 똑똑똑의 노예들, 똑똑똑의 좀비들이 아닐까. 나아가 똑똑똑은 마음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라, 거꾸로 마음을 두드려 패는 소리는 아닐까. 대화를 만드는 소리가 아니라, 거꾸로 대화를 부수는 소리, 똑똑똑. 똑똑똑은 분명히 문을 열고, 문 안에 있던 그에게 안녕을 건네기 위함이지, 결코 똑똑똑 자체를 위함은 아닐 게다. 술은 사랑을 고백하기 위함, 그 용기를 얻기 위함일 때 위대한 음료일 뿐, 술이 술 자체를 위한 술이 될 때 그건 그저 중독이고 진상이다. 똑똑똑의 요란함만큼이나 정작 할 말이 많은지, 들을 말은 많은지, 무엇보다도 말하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요. 갑자기 존댓말을 쓴 이유는, 방금 쓴 문장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에게도 정중하게 건네고 싶어서다. 똑똑똑. 내가 굳이 두드리지 않아도 이미 천지삐까리 차고 넘치는 똑똑똑의 홍수 속에서, 문을 두드리는 용기마저 페북의 찔러보기 버튼으로 프로그램화된 똑시 똑분 똑초 속에서,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려본다. 리트위트나 좋아요 엄지척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고백해보기 위해서. 똑똑똑.
칼럼 |
[김곡의 똑똑똑] 마음 두드리는 소리 |
영화감독 똑똑똑. 이건 덜 잠긴 수도꼭지 물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다. 이건 <한겨레>에서 힐링(?) 꼭지를 제안받았을 때 내 머릿속에, 각박한 영화판을 전전하며 힐링이라고는 시나리오 한 장면 완성할 때마다 뻑뻑 피워대는 담배 한 개비가 전부인 힐링불능자 김곡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성어이고, 그동안 닫을 줄만 알았지 열 줄은 몰랐던 마음의 문을 열어보자는 기개로 나름 생각해낸 소리, 즉슨 대화를 위해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 똑똑똑이다. 똑똑똑. 살아 계십니까? 똑똑똑. 안녕하십니까? 똑똑똑. 요새 잘 지내나요? 그래. 요새같이 각박한 세상에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똑똑똑인가 보다. …라며 꼭지 제목 참으로 잘 지었다며 자화자찬하고 있는데, 어쿠나. 다시 돌아보니 이 세상엔 이미 너무 많은 똑똑똑이 있다. 도시는 이미 너무 많은 간판들과 광고판들로 도배되어 있어서 길 걷는 잠재적 소비자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고, 티브이는 이미 너무 많은 채널들과 시청률 경쟁 드립으로 잠재적 시청자들의 마음과 리모컨을 두드리고 있지 않은가. 그뿐인가. 핸드폰엔 에스엔에스(SNS) 친구들이 쉴 틈을 주지 않고 똑똑똑. 컴퓨터 속엔 유튜브 친구들이 무수한 채널들로 똑똑똑. 우리네 삶의 1분 1초가 이미 모두 똑똑똑. 똑똑똑이다. 똑시 똑분 똑초. 이건 거의 똑똑똑 폭격 수준,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라 소음 수준이다. 게다가 똑똑똑의 소음에 비해서, 정작 그렇게 마음의 문을 열었을 때 이루어지는 대화는 얼마나 초라하고 빈약한가. 야. 왜. 뭐 함? 숨쉼. ㅇㅇ. 짱나. 나도. 너도. 우리도. ㅇㅇ. ㄱㄱ. ㄴㄴ. ㅇㅇ. ㅠㅠ. 실제로 페이스북에 ‘찔러보기’ 기능이 추가되어 놀란 적이 있다. 찔러보기란, 지금 접속해 있는 상대 페친이 나와 대화를 할 수 있는지, 아니면 단지 채널만 열어놓고 있어서 대화할 수 없는지 체크해보는, 순전히 기능적인 똑똑똑이었다. 이쯤 되면- 이 세상이 각박함은 똑똑똑이 너무 없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똑똑똑이 너무 많아서, 똑똑똑만 너무 흘러넘쳐서가 아닐까. 마치 빈 수레가 요란한 소리로 자신을 채워야 하는 것처럼, 정작 문을 두드려 열어도 별 할 말 없는 우리들이 그처럼 빈곤한 내면을 채우기 위해서 요란하게 문만 두드리듯, 우린 이미 똑똑똑에 중독된 자들, 똑똑똑의 노예들, 똑똑똑의 좀비들이 아닐까. 나아가 똑똑똑은 마음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라, 거꾸로 마음을 두드려 패는 소리는 아닐까. 대화를 만드는 소리가 아니라, 거꾸로 대화를 부수는 소리, 똑똑똑. 똑똑똑은 분명히 문을 열고, 문 안에 있던 그에게 안녕을 건네기 위함이지, 결코 똑똑똑 자체를 위함은 아닐 게다. 술은 사랑을 고백하기 위함, 그 용기를 얻기 위함일 때 위대한 음료일 뿐, 술이 술 자체를 위한 술이 될 때 그건 그저 중독이고 진상이다. 똑똑똑의 요란함만큼이나 정작 할 말이 많은지, 들을 말은 많은지, 무엇보다도 말하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요. 갑자기 존댓말을 쓴 이유는, 방금 쓴 문장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에게도 정중하게 건네고 싶어서다. 똑똑똑. 내가 굳이 두드리지 않아도 이미 천지삐까리 차고 넘치는 똑똑똑의 홍수 속에서, 문을 두드리는 용기마저 페북의 찔러보기 버튼으로 프로그램화된 똑시 똑분 똑초 속에서,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려본다. 리트위트나 좋아요 엄지척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고백해보기 위해서. 똑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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