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8.01 09:43
수정 : 2016.08.01 09:54
김곡 영화감독
만진다는 것, 즉 터치는 소통, 접속, 인지 따위의 현학적인 개념들로는 참으로 다 설명해내기가 어려운 말이다. 그딴 말들로 다 설명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터치에는 여전히 해명되지 않은 어떤 신비한 잉여작용들이 남는다. 개인적인 사례 중 으뜸은, 얼마 전 밥을 먹다가 마침 앓고 있던 충치를 반찬이 건드리는 바람에 까무러쳤던 경우다(깍두기가 충치의 협곡과 정확히 도킹되어 고통은 끝장이었다). 정말이지 차라리 죽고 싶은 고통이었다. 아내가 와서 슬며시 안아주고, 그로 인해 고통이 꼬리를 내리기 전까진. 또 하나의 부끄러운 사례는 담배를 끊었던 2년 전이다. 담배를 끊으니 입도 심심하고 손가락도 심심하고 해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에라 모르겠다, 아무 모서리나 만지던 해괴망측한 버릇이 생겼다. 만짐의 공핍을 정말 만짐으로 채우려고 했던 건 아니었을까? 아내의 포옹이 내 충치의 반란을 누그러뜨렸던 바로 그 신비로운 방식처럼?
물론 반론도 있을 수 있다. 충치의 고통을 정말로 제거한 것은 다음날 당신이 찾아간 치과 의사 선생님의 정밀한 과학이고, 무엇보다도 모서리나 만지던 일시적인 버릇은 다시 담배를 피우면서 사라질 심리적 증상이었을 것이란 반론들이 그것이다. 맞는 말이나, 반만 맞는다. 왜냐하면 충치의 고통을 영원히 제거한 것도 의사 선생님의 ‘터치’였으며, 모서리 촉각을 흡연에 다시 투항하게 한 것도 역시 니코틴과 폐의 ‘터치’였을 테니까 말이다. 터치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도, 그리고 서로에 대해 승리하고 패배하고 승복하고 다시 개기는 것도 터치끼리다.
난 터치의 이 신비한 힘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과학자들은 호르몬과 신경물질의 변화일 뿐이라고, 심리학자들은 생체자극을 통한 환영 같은 심리적 변화일 뿐이라고 대답하면 속은 편하시겠지만. 하지만 그들 역시 반만 옳다면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치는 우리의 삶에서 정말로 작동하는 실재임을 잊고 있기 때문이리라.
터치의 힘은 단지 호르몬도, 단지 심리도 아니라, 그 둘 중간쯤 어딘가를 가로지르는 놈, 다름 아닌 몸에서 나오는 것일 게다. 몸은 우리가 생을 살아내며 자주 잊곤 하는 요소지만(특히 한국처럼 몸을 ‘은따’시키는 유교적 질서 아래에선), 실상 몸은 소통의 중심이고 모든 자극과 신호들의 중앙교환국이다. 몸은 진정한 지식의 저장폴더다. 그렇다면 터치는 진정한 지식의 산출이다. 가장 진정한 지식이란 감각과 그 변화의 패턴, 즉 정서에 다름 아니다. 고통스러워하던 나를 어루만지던 나의 아내가 나에게 준 것은, 단지 신경물질도 심리적 환영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지식이었고, 진정 내 몸을 해결하는 지식이었다. 사실 모든 소통의 근원은 터치다. 왜냐하면 모든 발신자와 수신자의 원형은 몸이기 때문이다. 원격으로도 익명으로도 소통하는 디지털 시대에 웬 몸 타령, 터치 타령이냐고? 사실 디지털의 ‘digit’도 손가락을 뜻한다. 디지털도 손가락 터치에서 온 놈이다.
마지막 변론을 ‘터치의 귀환’으로 대신하련다. 요새 요리 프로그램이 인기다. 그것 역시 터치를 잃기 쉬운 이 시대에 맛이야말로 가장 공감되는 터치이기 때문이리라. 터치가 돌아오고 있다. 물론 이 터치를, 터치할 수 없는 티브이 스크린으로 대리하고 있음은 슬픈 일이다. 충치가 다 나았다. 아내와 함께 외식하러 나가련다. 진짜 터치를 위해. (깍두기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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