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돼지꿈을 꾸면 복권을 사야 한다. 당신은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 당신이 과학을 믿건 종교를 믿건 상관없다. 돼지꿈은, 이미 당신의 발걸음을 복권방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찌개에 빠진 파리는 어떠한가. 그리고 우연히 마주친 똥차는 또 어떠한가. 우리는 그것을 어떤 계시처럼 여기고 의문의 득템이라며 기뻐한다. 물론 가장 큰 득템은 징크스 그랜드슬램이다. 돼지꿈 꾸고 아침밥을 먹다가 찌개에 파리가 빠졌고, 출근하다가 똥차를 보았다. 복권 백장이오. 가장 재밌는 징크스는 우리 스스로 창작해내는 버전들일 것이다. 출근하다 보니 버스가 이미 정거장을 떠나고 있다. 뛸까 말까 망설이다가, 당신은 되뇐다. 그래 저걸 타면 이번에 진급한다. 그래 저걸 타면 도망간 애인 돌아온다. 그래 저걸 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징크스 창작에 투자된 단 1초 이후에, 이미 겁나게 전력질주하고 있는 당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물쭈물하던 1초 전과 비교해보면 이건 뭐 우사인 볼트 수준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버스를 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데 그 누가 거역하랴. 징크스는 없던 힘도 만들어내는, 진정한 파워이며 순수한 포스이다. 메이 더 징크스 비 위드 유(May The Jinx Be With You). 우린 왜 징크스를 믿고, 그것도 모자라 스스로 창작해내기까지 할까? 대답을 대신할 사실 하나는, 어떤 징크스도 ‘시험’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징크스가 우리에게 어떤 계시나 명령어처럼, 흡사 모세의 귓가에 맴돌던 하느님의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이유도, 그것이 우리를 어떤 시험에 들게 하기 때문이리라. 된장찌개에 파리가 빠졌다, 그러니 넌 오늘 진급시험에 붙는다. 버스를 타라, 아니면 넌 진급시험에 떨어진다…. 고로 가장 오래된 징크스 중 하나는, 아브라함의 징크스일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아들 이삭을 죽여보라고 명령한 야훼의 목소리가 바로 그 징크스인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진심으로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바로 그 진심 때문에 이삭이 되돌려지는 하나의 시험인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아브라함과 영웅을 대조시켰다.(<공포와 전율>) 그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영웅보다 더 신과 닮았다. 영웅은 보편성(필연, 윤리, 이성…)에 기대어 신에 다가가지만, 아브라함은 보편성을 넘어서 신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비록 미친 인간처럼 보일 수 있으나,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의 이성을 넘어서 있는 신(우연, 믿음, 기적…)에게 더 다가간 셈이다. 아브라함 에피소드는 신 존재 증명보다는 징크스 존재 증명이다. 징크스가 시험의 형식을 가지는 이유는, 그것이 이성을 넘어서 있는 우연에 우리를 노출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징크스가 시험이라는 사실은, 인생이 필연만큼이나 우연으로 이루어짐을 우리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인정함이다. 흙수저? 무한경쟁? 스펙? 똥파리 한방에 게임오버인 게 또한 인생임을 믿는 것, 그것이 징크스의 연료이자 엔진이다. 그래서 징크스는 희망의 형식이기도 하다. 징크스는 필연에 대항하는 우연의 힘이다. 그것은 필연에 추동되어 숨 쉴 틈 하나 없는 생의 인과계열에 자그마한 숨구멍을 낸다. 징크스의 진정한 효과는 당신이 결국 버스를 탔느냐 못 탔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우사인 볼트의 속도로 질주하는 당신의 바로 그 숨소리에 있다. 그 숨가쁨. 그것이 당신의 진정한 창작물이다.
방송·연예 |
[김곡의 똑똑똑] 징크스 |
영화감독 돼지꿈을 꾸면 복권을 사야 한다. 당신은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 당신이 과학을 믿건 종교를 믿건 상관없다. 돼지꿈은, 이미 당신의 발걸음을 복권방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찌개에 빠진 파리는 어떠한가. 그리고 우연히 마주친 똥차는 또 어떠한가. 우리는 그것을 어떤 계시처럼 여기고 의문의 득템이라며 기뻐한다. 물론 가장 큰 득템은 징크스 그랜드슬램이다. 돼지꿈 꾸고 아침밥을 먹다가 찌개에 파리가 빠졌고, 출근하다가 똥차를 보았다. 복권 백장이오. 가장 재밌는 징크스는 우리 스스로 창작해내는 버전들일 것이다. 출근하다 보니 버스가 이미 정거장을 떠나고 있다. 뛸까 말까 망설이다가, 당신은 되뇐다. 그래 저걸 타면 이번에 진급한다. 그래 저걸 타면 도망간 애인 돌아온다. 그래 저걸 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징크스 창작에 투자된 단 1초 이후에, 이미 겁나게 전력질주하고 있는 당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물쭈물하던 1초 전과 비교해보면 이건 뭐 우사인 볼트 수준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버스를 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데 그 누가 거역하랴. 징크스는 없던 힘도 만들어내는, 진정한 파워이며 순수한 포스이다. 메이 더 징크스 비 위드 유(May The Jinx Be With You). 우린 왜 징크스를 믿고, 그것도 모자라 스스로 창작해내기까지 할까? 대답을 대신할 사실 하나는, 어떤 징크스도 ‘시험’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징크스가 우리에게 어떤 계시나 명령어처럼, 흡사 모세의 귓가에 맴돌던 하느님의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이유도, 그것이 우리를 어떤 시험에 들게 하기 때문이리라. 된장찌개에 파리가 빠졌다, 그러니 넌 오늘 진급시험에 붙는다. 버스를 타라, 아니면 넌 진급시험에 떨어진다…. 고로 가장 오래된 징크스 중 하나는, 아브라함의 징크스일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아들 이삭을 죽여보라고 명령한 야훼의 목소리가 바로 그 징크스인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진심으로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바로 그 진심 때문에 이삭이 되돌려지는 하나의 시험인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아브라함과 영웅을 대조시켰다.(<공포와 전율>) 그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영웅보다 더 신과 닮았다. 영웅은 보편성(필연, 윤리, 이성…)에 기대어 신에 다가가지만, 아브라함은 보편성을 넘어서 신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비록 미친 인간처럼 보일 수 있으나,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의 이성을 넘어서 있는 신(우연, 믿음, 기적…)에게 더 다가간 셈이다. 아브라함 에피소드는 신 존재 증명보다는 징크스 존재 증명이다. 징크스가 시험의 형식을 가지는 이유는, 그것이 이성을 넘어서 있는 우연에 우리를 노출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징크스가 시험이라는 사실은, 인생이 필연만큼이나 우연으로 이루어짐을 우리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인정함이다. 흙수저? 무한경쟁? 스펙? 똥파리 한방에 게임오버인 게 또한 인생임을 믿는 것, 그것이 징크스의 연료이자 엔진이다. 그래서 징크스는 희망의 형식이기도 하다. 징크스는 필연에 대항하는 우연의 힘이다. 그것은 필연에 추동되어 숨 쉴 틈 하나 없는 생의 인과계열에 자그마한 숨구멍을 낸다. 징크스의 진정한 효과는 당신이 결국 버스를 탔느냐 못 탔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우사인 볼트의 속도로 질주하는 당신의 바로 그 숨소리에 있다. 그 숨가쁨. 그것이 당신의 진정한 창작물이다.
기사공유하기